말세에 믿음을 보겠는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0-09 19:39
조회
412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냐?
2009-10-19

이 시대를 일컬어 신자나 불신자나 공히 말세라고 합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는 주님의 말씀은 아마도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 첫째는 말세에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과, 다른 하나는 말세에 믿음을 지키는 이가 적다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 암흑시대
중세 시대를 종교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종교가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온갖 탈법과 불법이 저질러졌고,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과 재판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사제들은 성직을 매매하고, 이를 비판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고문과 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사제들은 막강한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제들은 이를 악용하여 도저히 사제라고 믿기 어려울 행동들을 부끄럼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환경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들의 신앙고백을 지켜왔습니다. 그 분들이 목숨 걸고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Text 와 Context
이 땅에 교회도 많고 신자도 많지만, 실제로 믿음을 가진 이가 적은 가운데 있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신자인가? 신자라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곳 애틀란타에 신앙생활에 상처를 입고 실족한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이야기라면 아예 말문을 닫아 버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 역시 이 때문에 이곳 애틀란타에 살면서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기가 망설여지고,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는 목사답게 살아야 하고, 신자는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곳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이민 사회의 특수한 환경(context)이라는 상황윤리(ethic situation)윤리로 덮어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Context 가 Text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지나친 율법주의도 문제지만, 상황윤리는 자칫 무법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신자의 삶에서 성경이 삶의 잣대(canon)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윤리는 ‘사랑을 따르라! 그것이 곧 법이다.’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애매한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고자 한다면 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민사회의 특수한 환경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처럼 ‘나는 내 믿음을 지키겠다.’ 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입니다(히 13:8).

종말을 사는 믿음
노아 시대도 지금처럼 말세였습니다. 그 때에 ‘120 년 후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황윤리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상황은 이제껏 비가 온 적도 없었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에 대해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시대의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시집가고 장가가기에 바쁜 세상 사람들과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마 24:8) 자그마치 120 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산에서 배를 짓는 노아의 바보 같은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방주를 지어 그 시대 말씀의 증인(witness)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세(degenerate)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조급함과 달리 하나님은 오래참고 기다리십니다.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신 하나님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대 우리의 할 일은 이 시대에 세상과 다른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짓고 말씀의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믿음으로 말세에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이 힘들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볼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 이민사회에서도 Context 보다는 Text가 중요하다는 것을 삶으로 후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노아가 그 시대의 남은 자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방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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