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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10-10 11:48
조회
239
신라통일의 발자취를 따라
2008/08/11

1. 여행을 시작하면서

"신라는 정치와 외교를 잘한 영국, 백제는 문화와 예술이 발달했던 프랑스, 고구려는 무단적이었던 독일과 비슷"

편집자 注: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개념은 삼국통일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여행은 신라통일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충북 진천, 옥천, 경북 경주, 충남 논산, 충남 부여 등에 위치한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을 2005년 11월11일부터 13일까지 여행했다.
1편은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車中 강연을 한 내용이다.

조갑제: 안녕하십니까. 마이크가 굉장히 좋네요. 유럽이나 일본 여행할 때는 마이크가 별로였는데 마이크는 역시 국산이 좋은 모양입니다.

오늘 지금 내려가는 방향이 진천, 옥천, 경주루트입니다. 이 방향이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진천은 生居鎭川(생거진천), 死居龍仁(사거용인)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가보시면 왜 생거진천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편안하고 사고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바람도 안불고 홍수가 난 적이 없고 지진도 없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비명횡사해서 죽을 가능성이 우리나라에서 아마 제일 적을 겁니다. 그런데 진천은 金庾信(김유신)하고 관련있는 유적이 있습니다.

삼국통일하면 세 사람이 떠오르는데 태종무열왕, 외교를 맡아 해서 당나라와 목숨을 건 외교를 합니다. 통일은 그 아들 때인 문무왕 때 했지요. 그 두 분을 모시고 장수하면서 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통일하면 바로 연상되는 건 태종무열왕과 문무왕보다는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은 太大角干(태대각간)이라는 최고 직책까지 올랐습니다. 말하자면 국방장관을 30~40년 한 겁니다. 이 분의 생애가 특이한 게 7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 79세 살았다면 지금으로 치면 100세 정도하고 비슷할 겁니다. 세종대왕 같은 분들은 다들 50세 정도까지 살았고 문무왕도 50세에 죽었습니다. 김유신이 79세까지 살았다는 게 신라의 운명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천에 가면 김유신 사당인 吉祥祠(길상사)가 있습니다. 길상사는 절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 다음에 용화사가 있는데 여기는 김유신을 기리고 고려시대 불상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김유신의 생가,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최근에 새로 지은 우리나라 명물이 하나 생겼습니다. 寶塔寺(보탑사)라는 절입니다. 이 절은 申榮勳(신영훈) 씨라고 목수인데 아주 큰 목수죠. 이 사람이 지은 절입니다. 그게 요새 구경거리가 돼서 그 마을에 일년에 몇 십만 명이 온답니다. 그 다음에 식사를 하고 이동할 겁니다.

삼국통일을 테마로 잡은 이유는 우리가 이제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을 생각하자는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과거에 삼국통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 후삼국 시대 수십년 동안 갈라졌다가 王建에 의해 통일이 됐습니다. 다가오는 남북통일까지 포함하면 세 번의 통일입니다.

이런 시기에 맞춰 통일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과 두 번째는 우리 민족이 생겨난 계기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입니다. 한반도가 산동성의 일부, 중국의 일부가 되지 않고서 우리가 한국말을 쓰면서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게 된 것은 신라통일 때부터입니다. 신라가 통일을 했기 때문에, 신라가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결전을 통해 唐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냈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의 식민지가 안됐습니다. 지리적으로만 본다면 우리가 중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정상일텐데 바로 이 김유신과 문무왕, 태종무열왕의 리더십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되새겨보자는 뜻이 이번 여행속에 있습니다.

제가 삼국통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된 것이 아니고 한 10여 년 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삼국통일의 뜻을 알게 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굉장히 자랑할 만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 같은 영웅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유럽에 가면 영웅들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저는 전쟁에도 관심이 많고 이래서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 시저, 비스마르크 같은 영웅들을 많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라의 삼국통일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김유신이나 김춘추 문무왕 사람들이 유럽의 영웅들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아,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하는 자부심이 저절로 생기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있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찬란한 문화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족사에서 딱 한 번 선진국이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건 신라통일 전후로 해서 300여년, 6~9세기까지입니다. 이 기간은 신라가 세계의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유럽이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잘 아시겠지만 중세암흑시대였습니다. 로마가 망해가는 게 4세기. 결정적인 이유가 게르만족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로마와 싸우다가 4세기 쯤 되면 우리의 조상쯤되는 훈족(흉노족)이 나타나 게르만족을 치니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서쪽으로 밀려갑니니다.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권 즉 로마 문명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무너져버렸습니다. 로마가 무너지니까 서구의 문명 세계가 무너졌습니다. 야만시대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뒤 400~500년 동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중세의 암흑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이 암흑시대라는 것은 아무 것도 만든 게 없어요. 유럽 여행을 많이 가신 분은 아실 겁니다. 유럽에 가보면 4세기에서 11세기까지 지은 건물이 거의 없습니다. 이 암흑시대에 기능했던 교회죠. 그때 유럽문명을 지탱한 것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 등 여러 정권들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세계 전체를 보면 문명의 중심이 어디냐? 동북아시아였습니다. 당나라와 신라였습니다. 여기가 7세기, 8세기, 9세기에는 세계적인 문명의 중심이었습니다. 7세기 무렵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 문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동의 이슬람, 동양의 당, 신라, 일본, 대충 이런 나라들이 선진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은 당시 세계사에서 ‘Big 3’였을 겁니다. 국력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말이죠. 그것을 염두에 두시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신라는 민족사에서는 유일한 선진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통일을 한다면 역사상 두 번째의 선진국이 되는 길이 열립니다. 신라를 연구하면 선진국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이번 여행의 한 목적입니다.

이번 여행을 하시면서는 일단 時計(시계)를 6세기 경으로 맞추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 550년대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먼저 옥천에 왜 가느냐. 서기 554년에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쟁이 거기서 있었습니다. 관산성 전투입니다. 요새 SBS인가 어디 드라마에서 그 장면이 나오는 걸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잡혀서 노예한테 목이 달아나는 장면을 보여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때 신라는 진흥왕이었습니다. 진흥왕하면 보통 생각하시는 게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북한산에 있다가 망가진다 그래서 박물관으로 옮긴 거 아시죠. 그런데 ‘진흥왕 순수비가 왜 북한산에 있느냐’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당시 진흥왕은 영토를 북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해서 함경도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겁니다. 서울을 차지한 겁니다. 서울과 한강을 차지한 사람은 한반도의 주인이 됩니다. 한강 유역은 우선 좋은 땅이 많고 하구를 통해서 중국과 왕래가 용이합니다. 한강을 놓치면 한민족의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바로 북한의 경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흥왕은 일곱 살 때 왕이 됐습니다. 어머니가 계속 섭정을 하다가 20대에 들어와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백제에서도 유명한 왕이 나왔습니다. 무녕왕의 아들이 성왕입니다. 성왕이 또 백제의 아주 영명한 왕이었습니다. 백제도 전성기고 신라도 전성기였고 아주 두 英傑(영걸)들이 운명적으로 만난거죠.
그 전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국이었습니다. 왜냐? 고구려가 계속 남침을 하니까 동맹을 맺은 겁니다. 장수왕 이런 사람들이 특히 백제를 치려고 계속 남침을 하자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성왕과 진흥왕 시절이 되면서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성왕, 진흥왕 다 야심만만한 사람들이니까 동맹이 깨지기 시작한 겁니다.
먼저 신라가 동맹을 깨죠.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사이에 공격해서 양쪽의 영토를 다 점령해버리죠. 그러다가 옥천에서 양쪽 군대가 결전을 합니다. 현장에 가면 향토 사학자 분께서 나오셔서 더 실감있게 설명을 하실 겁니다. 저는 개괄적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드리는 겁니다.

이때 동북아시아 전체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관산성 전투가 있었던 554년에 동북아에서는 어떤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는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중국에는 잘 아시는 삼국지 시대가 지났습니다. 유비, 장비, 관운장이 나오는 삼국지는 다 아실 겁니다. 이 삼국지 시대가 3세기의 시대인데 晉 나라가 통일을 해 끝납니다. 이게 100년을 못갑니다. 왜 못갔느냐? 북쪽의 기마민족이 쳐들어 옵니다. 활 쏘고 말 타는 기마민족이 쳐들어 오는 바람에 晉나라가 망해버리고 그 뒤에 약 300년 동안 역사에서 5胡(호) 16國 시대가 시작됩니다. 5胡(호), 다섯 오랑캐가 16國, 16개 나라를 만드는 시대입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태가 일어나다가 화북 지방에서 北魏라는 나라가 생깁니다. 이 나라가 화북지방을 통일합니다. 이 나라가 나중에 몇 단계를 거쳐서 隋나라가 됩니다. 隋나라가 300여년 간 계속된 5胡 16國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합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554년은 아직 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입니다.
그 다음에 일본은 어땠느냐? 삼국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왜 일본을 이야기하느냐?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 당, 그리고 일본하고도 싸웁니다. 한반도 통일은 반드시 국제적인 관계속에서 간섭을 받게 되는 겁니다. 중국과 일본이 개입하는 겁니다. 삼국통일 때부터 그런 일이 시작된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정세를 아셔야 되는 겁니다.

일본은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냐. 고대 일본은 가야 사람들이 主力이 되어 만든 나라입니다. 가야 사람들 중에 용감한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건너갑니다. 규슈로 건너가서 지금의 후쿠오카 부근에서 왕국을 만들어 힘을 비축합니다. 요 상태에서 규슈, 대마도, 지금의 경상남도에 있던 가야, 이것이 한 덩어리가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현해탄을 끼고 일본과 한국에 걸쳐서 일종의 가야 연방국이 생기는 겁니다. 이 세력의 주력은 계속해서 일본으로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한반도에 남은 가야는 주력이 빠진 상태에서 부족국가 상태를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돼 버립니다. 주력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 사람들이 규슈 지방에서 왕국을 만들었다가 그걸 징검다리로 사용해가지고 4세기경부터 어디로 가느냐. 지금의 나라, 교토, 오사카 지방으로 진출합니다. 여기를 일본 사람들이 긴키 지방이라고 그럽니다.
일본 지도를 보면 규슈에서 오사카까지 가려면 신칸센을 타는 방법도 있지만 세도나이카이라는 호수처럼 생긴 바다로 항해하면 아주 안전하게 오사카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규슈로 갔던 가야 사람들은 다시 나라 지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야마토 정권(大和 정권)을 세웁니다. 이게 고대 일본의 시작이 되는 거죠. 이게 4세기쯤 됩니다. 그런데 이 가야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떠난 고향을 생각합니다. 가만보니까 가야를 먹으려는 나라가 있는 겁니다. 신라입니다. 신라가 계속 가야를 침공하려 하니까 어떻겠습니까? 가야가 만든 일본 야마토 정권(倭)과 신라는 敵國(적국)이 됩니다. 이게 운명적으로 지금의 韓日관계로까지 이어집니다.
韓日 관계가 왜 이렇게 감정이 나쁘냐? 그 출발점이 가야 사람과 신라 사람의 대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 백제가 붙습니다.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 보니까 고향이 망할 것 같아 보입니다. 倭는 그래서 백제와 연합을 합니다. 결국 일본, 가야, 백제, 이 세 나라가 연합해서 신라와 對敵하게 됩니다.
554년 신라 진흥왕이 관산성(지금의 옥천)까지 3만 명을 데리고 오고 백제 성왕의 아들이 약 3만 명을 동원합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백제 편에 선 것이 대가야, 왜군(일본군)이었습니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 對 백제-가야-왜의 국제전이 됐습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제가 나눠드린 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읽어보시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554년 일본에서 몇천 명의 지원군이 건너오고, 백제와 가야가 손을 잡고는 산이 많은 산악지대인 옥천에서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겁니다. 백제 聖王이 신라군에게 잡혀 죽는 바람에 진흥왕의 신라 군대가 거의 완승을 했습니다.
이 전투가 왜 우리 민족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냐? 당시 가야가 옥천 전투에 약 1만 명을 보냈다가 백제군과 같이 전멸을 했습니다. 그 10년 뒤에 가야가 망했습니다. 당시 대가야는 경북 고령에 있었는데, 이렇게 하여 신라가 경상남도 지역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야 사람들이 철, 쇠를 잘 만들었습니다. 일본에 쇠 기술을 가지고 간 것도 가야 사람들이고 일본을 점령할 수 있었던 힘의 배경도 쇠를 잘 다루고 무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야는 종합제철소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던 겁니다.
우리가 1960년대 힘도 없으면서 왜 종합제철소를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느냐? 종합제철소가 있어야 공업력을 키울 수 있고 이를 통해 무기를 만들어야 북한과 싸울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무기를 쇠로 만들었기 때문에 製鐵(제철) 기술이 지금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신라는 가야를 점령했기 때문에 철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확장하게 되었고, 삼국통일로 갈 수 있는 관문을 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있습니다. 김유신은 누구냐. 조상이 지금 김해, 즉 금관가야의 왕입니다. 김수로 왕의 후손입니다. 금관가야는 자진해서 신라에 항복하였고, 신라는 금관가야의 왕족을 받아들여 대우를 잘 해줍니다. 신라가 통일해가는 과정을 보면 포용력이 강하고 개방적입니다. 너그러운 나라입니다. 정치를 참 잘한 나라가 신라입니다. 저는 가끔 신라, 백제, 고구려를 유럽 나라에 비교합니다. 신라는 영국을 닮은 나라, 프랑스는 백제, 고구려는 독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신라와 영국은 외교와 정치를 잘했고, 백제와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이 뛰어나고 고구려와 독일은 용감하여 전투에 능했습니다. 정치와 외교에 뛰어났던 신라와 영국이 패권을 잡은 것입니다. 신라는 포용성이 커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족을 장군으로 임명하기도 합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그런 예입니다.
관산성 전투가 있었을 때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金武力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주둔하고 있었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경기도 이천에서 지구사령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옥천에서 전쟁이 일어나니까 부대를 이끌고 이천에서 진천을 거쳐 옥천으로 내려갔습니다. 백제 성왕과 싸울 때 아주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뒤 김무력의 집안은 진천에서 수비군 사령관 겸 지구 계엄 사령관이 됩니다. 이것이 진천에서 김유신이 태어나게 된 이유입니다.

김유신은 말하자면 망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면서도 신라의 실력자가 된 겁니다. 이런 경우는 특이하지 않습니까. 敵國에서 항복한 사람이 항복을 받아준 나라의 실력자가 됐다는 것이 신묘합니다. 더구나 신라는 ‘眞骨(진골)’, ‘聖骨(성골)’이라고 해서 피를 굉장히 따지는 나라인데 어떻게 적국의 왕족 후예가 신라의 실력자가 되느냐.
그 중간단계에 바로 할아버지 김무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관산성에서 큰 공을 세우기 때문에 이 집안이 신라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김유신은 소년기 때 화랑도의 대표가 됩니다. 화랑도의 대표를 風月主(풍월주)라고 하는데 김유신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부관이 金春秋(김춘추)였습니다. 나이가 여섯 살 아래입니다.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김춘추의 여동생 문희가 꿈을 꾸고 해서 김유신과 결혼하게 됩니다. 김유신과 김춘추家가 결혼한 것은, 김춘추로 대표되는 신라왕족과-김춘추는 물론 왕족 출신입니다. 왕족이지만 약간 중심에서 밀려난 집안입니다- 가야계 김유신 세력이 손을 잡아가지고 권력을 잡는 발판을 만들고 이를 도약대로 삼아 삼국을 통일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우리 역사에서 참 드문 경우입니다. 김유신은 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30년 동안 兵權(병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국방부장관이 된 거죠. 그것도 네 왕을 모시면서 병권을 유지했습니다. 무서운 병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이 네 사람을 극진히 모시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나?

김유신 같이 병권을 가진 사람이 오래 살면 보통 왕은 그 사람을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병권을 가진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직접 왕이 돼 버리는데 어떻게 평화롭게 네 명의 왕을 모시면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원동력을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기적적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거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됐느냐 살펴보면 첫째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姻戚(인척), 婚戚(혼척), 그 다음에 삼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大義에 대한 어떤 합의,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신라가 망하지 않는 한 김유신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왕은 진골과 성골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안심을 했겠죠.

김유신의 혼인관계가 재미있습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합니다. 그 사이에서 문무왕이 납니다. 그런데 김춘추의 딸이 있었습니다. 김춘추의 딸이 다시 김유신의 부인이 됩니다. 이런 근친혼은 신라 당시에는 상식이었습니다.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三國史記를 꼭 읽으셔야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돌아가셔서 꼭 삼국사기를 읽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방향이, 아마 이천에서 진천, 옥천으로 가는 그 고속도로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554년 부대를 이끌고 진흥왕을 구원하기 위해 가던 그 길일 겁니다. 일단 도입부는 여기서 마치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金氏 이야기

"동북아시아 역사에서의 주도 세력이 바로 김씨입니다. 김씨는 정말 굉장한 브랜드입니다"

편집자注: 2편 김씨 이야기는 충북 진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趙甲濟 월간조선 편집 위원이 강연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조갑제: 우리는 보통 김유신을 경상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충북 진천 사람들은 김유신을 진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충북 진천 사람이 맞습니다. 진천에서 三代를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진천에서는 화랑도, 김유신, 태권도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시설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 여행을 해보면 지방의 작은 마을 같은 곳에 그 藩(번)을 발전시켰던 과거의 영주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만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드디어 그런 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鄕土史(향토사)라는 게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역사를 쓰면 당쟁 이야기, 권력투쟁 이야기같은 것들 위주로 서술되는데 향토사의 경우에는 어디서 누가 태어나고, 어릴 때 어떻게 자라고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실감나고 따뜻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오늘 명단을 보니까 김씨 姓을 가지신 분들이 여섯 분이신데요, 여기서 김해 김씨가 몇 분이십니까? 제가 오늘 김씨 성에 대해서 말씀을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쉽게 듣기 어려운 겁니다. 이 이야기를 위해 외국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주도 세력이 바로 김씨입니다. 김씨는 정말 굉장한 브랜드입니다. 김씨는 가야 계통 김씨와 신라계통 김씨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약 800만 정도입니다. 이중 60% 정도가 김해 김씨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명한 다섯 김씨가 있지 않습니까? 金日成, 金正日, 金大中, 金泳三, 金鍾泌, 이렇게 다섯 명이죠. 金泳三씨는 김해의 옛 지명인 金陵(금릉) 김씨고 金大中, 金鍾泌씨가 김해 김씨입니다. 金日成 일가는 전주 김씨죠. 전주 김씨는 김해 김씨에서 나온 겁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姓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옛날 장기영씨가 천황가의 황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도 사실 짐씨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 말로는 김씨라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김씨냐 하면 가야 김씨라는 겁니다.

일제 시대 총독부가 들어오면서 이상한 법령을 만듭니다. 김해 김씨는 족보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왜냐? 이건 추측입니다만 김해 김씨의 족보가 자세히 만들어지면 자기네 천황가와 연결된 것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라는 것입니다.
천황가에서 모시는 神이 셋 있는데 이 세 사람의 神이 모두 가야 계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일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야 출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김씨의 역사를 보면 漢 武帝(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무제가 흉노를 토벌하는 데 흉노의 왕자가 투항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을 지어주는데 자네는 고향이 어디냐 하니까 ‘알타이에서 왔습니다’하는 겁니다. 알타이의 뜻이 뭐냐 물으니까 金(금)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한무제는 그렇다면 너의 성은 김으로 하라고 해서 만들어집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김일제입니다. 사마천의 漢書(한서)라는 데 보면 김일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한무제의 경호실장 역할을 맡아 가문이 아주 융성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중국 역사에 보면 한나라가 두 동강이 나죠. 중간에 王莽(왕망)이 쿠데타를 일으켜 ‘新(신)’이라는 나라를 만드는데 그 때 김일제가 거기에 가담했다고 해서 왕망이 무너지고 나중에 後漢(후한)이 생겼을 때 이 사람들이 쫓겨나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가설이 생겼습니다.

신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입니다. 알에서 나와서 김알지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알타이에서 왔다고 해서 알지라고 한 겁니다. 김알지를 한자로 하면 金金입니다. 그 다음에 김수로 왕은 나름대로의 김해 김씨입니다.
그 다음에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만들 때는 後金(후금)이라고 했습니다. 왜 후금이라고 했냐하면 그 앞에 금나라가 하나 있어요. 요나라, 금나라 아시죠? 11세기 경에. 이 금나라를 누가 만들었냐 하면, 신라 유민 출신인 김한보라는 사람이 만주로 가서 시작한 부족이 나중에 금나라를 만들죠. 그래서 金史(금사)라는 역사서에 보면 ‘신라사람 김한보가 우리의 부족을 만들고’ 등등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래 옛날에는 나라를 세우면 자신의 성씨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맥을 이어서 같은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17세기에 중국을 점령하고 세운 나라가 청나라입니다. 그럼 청나라 왕족 성씨도 김씨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성씨를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愛, 신라 新, 생각할 覺, 신라 羅 이렇게 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말자’ 그런 뜻이 되는데 그건 그런 뜻도 있지만 金을 만주말로 안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자로 고친 겁니다. 그런데 손문이 혁명을 일으키고 모택동이 공산혁명을 일으키고 해서 청나라 왕족이 평민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모두 김씨로 돌아갔습니다. 여기도 김씨 세상이었죠?
이처럼 일본도 한국도 모두 김씨 세상이었습니다.

징기스칸은 무슨 성씨였을까요? 징기스칸도 김씨였습니다. 징기스칸을 황금씨족이라고 합니다. 징기스칸이 자신의 가문을 말할 때 황금씨족이라고 그랬습니다. 몽고말로 보르테 오호락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황금씨족이라는 말입니다. 황금씨족이라면 김씨입니다.
경주의 옛날 이름은 아시죠? 金城(금성)입니다. 이번에 경주에 가서 천마총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라가 세계에서 내놓을만한 게 주로 금으로 된 겁니다. 금관, 금귀걸이 등은 세계적입니다. 금 세공기술도 세계적입니다. 왜 이렇게 금이냐? 이렇게 되면 족보가 죽 나옵니다. 김씨는 동북아시아 흉노 계통 유목민족의 표상입니다. 브랜드입니다. 김씨 성을 가진 나라는 그 지배민족들이 다 유목민족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금이냐? 알타이에서 시작된 거죠. 유목민족의 고향이 알타이거든요. 알타이가 금입니다. 왜 금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 유목민족들은 항상 이동해야 합니다. 정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양떼를 몰고 항상 이동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값이 비싸고 가볍고 어디서나 통용되는 게 바로 금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기술은 좀 떨어져도 금과 관계되는 것은 잘 만들고, 특히 금 세공기술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북아시아에서는 대충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漢族(한족),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진짜 중국인들, 그 다음에 북방유목민족계통, 그런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일본, 한국, 금, 요, 원, 당-당나라도 유목민족 출신입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순수 중국인들이 세운 나라는 한나라, 진나라, 송나라, 명나라 정도밖에 없습니다. 순수 한족이 세운 나라는 좀 약합니다. 진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곳은 힘이 셉니다. 그러나 이제 한족 인구가 많으니까 모두 흡수됩니다. 그래서 이 한족 계통의 농경민족과 북방 유목민족 계통이 아시아에서는 항상 남북으로 대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일본, 한국, 몽고가 남아있습니다. 중앙아시아로 가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우리 계통이고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곳이 우리와 사촌쯤 되는 혈통입니다. 그러니까 김씨는 굉장한 씨족입니다. 김씨는 동북아시아의 제일 유명한 가문이고 그 사람들이 사실은 한국의 주류세력입니다. 그러니까 요새도 3김씨가 큰 소리를 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선거에서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씨가 10만 표 차이로 당선된 것 중에서 김해 김씨의 영향도 있습니다. 경상도에 김해 김씨가 많은데 그 지역에서 김대중씨를 밀어준 것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야담과 실화가 아니라 상당한 근
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正史에 가깝습니다. 김해 김씨들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많이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3. 吉祥祠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추증)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편집자注: 3편 '길상사 이야기'에서는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인 '길상사'에 얽힌 이야기를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이 설명했다.

조갑제: 오늘 진천에서 볼 유적지와 역사를 소개해 주실 신운철 계장님이십니다.

신운철 진천군 문화관광과 계장: 안녕하세요. 生居鎭川(생거진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보실 곳은 김유신 장군을 모신 吉祥祠(길상사)와 김유신 장군 생가터 등입니다.
저희는 진천을 화랑 정신이 발현된 곳이라고도 합니다. 맨 처음 보실 길상사는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곳을 절(寺)로 착각하시기도 합니다. 지금도 종종 저희 문화체육과로 편지가 올 때 길상사 주지 앞 이렇게 적힌 편지가 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김유신 장군을 모신 주요 사당이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천에 있는 영정을 표준 영정이라고 해서 김유신 장군 영정을 그릴 때 여기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영정은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는데 1976년도에 사적 정리사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3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들였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여기 사당의 위치는 네 번째 옮기면서 자리한 곳입니다. 당초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상계리 뒷산인 길상산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리가 안돼 옮기고 옮기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은 1926년입니다. 한 50년 후인 1976년, 사적지 정리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담산성이라고 해서 삼국시대 당시의 산성입니다. 길상사가 이 산성 안에 있습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진천의 全景이 펼쳐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길상사에 가셔서는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기 때문에 祭禮(제례)를 지낼 때 절을 네 번 해야 합니다. 여기 길상사 올라가는 길은 봄에는 벚꽃이 화려하게 핍니다.
그 다음에 진천에 있는 화랑도 유적이나 김유신 장군 유적 중에 길상사를 첫 번째 코스로 잡는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께서 오셨길래 ‘먼저 길상사에 들러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십시오’ 부탁을 드렸는데 그 분께서 바쁘시다고 길상사에는 안 들르고 다른 곳을 보고 가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저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진천에 오시면 먼저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 관광을 하시라는 의미에서 코스를 이렇게 잡은 겁니다.
김유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사적으로 지적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곳에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왜 잘못 알려졌느냐 하면 지금 남아있는 고전 중에서 三國史記 列傳 제일 앞 부분에 써있는 글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유신 장군께서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는 사후 160년 후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왕은 神과 같은 존재로 백성하고 신은 분류됐기 때문에 추증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死後 160년 후에 追贈되신 겁니다.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 가보시면 위업비도 문무왕 위업비와 형태가 같고 경주에 가보시면 영정도 왕관을 쓰고 용포를 입으신 모습으로 나와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등 뒤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북두칠성은 으뜸별이 아니지 않습니까.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면서 하늘의 운행을 관리하는 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유신 장군은 자신이 신하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셔서 본인의 운명에 순응했습니다. 당시 김유신 장군은 모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권력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다 자신 또한 가야의 후손이라는 당위성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부분 때문에 인간적으로 높이 존경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듯이 삼국통일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음험하게 이뤄졌다는 주장이나 음침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시대에 들어 왜곡된 평가들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로 이뤄져야 하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갑제: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에 대한 부분이 제일 깁니다. 왕에 대한 이야기들보다도 깁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삼국시대 제일 인물로 꼽은 것이 김유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편집자로써의 평가죠.

신운철: 이 길상사 주변을 보시면 성 흔적이 보이구요, 외곽 부분은 흙에 묻혀 있습니다. 이 都堂山城(도당산성)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성곽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진천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유적이 混在(혼재)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의 진천 지역이 삼국 시대의 爭覇(쟁패) 지역이다 보니까 고구려 땅이었다가 백제 땅이었다가 신라 땅이었다가 했다는 겁니다. 삼국의 격전지역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신라가 진천을 쟁패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팻말이 있는 부분을 보시면 우물이 있습니다. 여기 도당산성에는 우물이 두 군데가 있는데 우물이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여기서 물을 길러 먹었다는 이야기고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말입니다. 즉, 生城(생성)이었다는 겁니다. 도당산성은 지금은 도읍 ‘都’에 집 ‘堂’을 쓰는데 그 부분이 잘못됐다, 이것은 누군가가 한문을 바꿨다 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대로 쓰려면 무리 ‘徒(도)’자, 화랑도 할 때 이 ‘徒’를 씁니다. 그리고 깃발 ‘幢(당)’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 徒幢(도당)은 곧 郎幢(낭당)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에는 ‘郎幢(낭당)’이라는 무적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낭당부대가 주둔하던 곳이 이 곳이고 그 낭당부대의 주력은 화랑도들이었다는 겁니다.
저 앞에 17번 국도가 보이는데 이 국도 공사를 하면서 지표조사를 했습니다. 지표조사를 하면서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충북대 학술조사단에서 유물들을 조사했는데 당시 발견된 무덤들이 화랑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이게 도당산성하고 연계가 됐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전투하다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당산성도 상당히 중요한 유적인데 이 부분도 아까 말씀드린 연구하고 병행해서 복원시켜야 할 겁니다.
여기는 탄생지입니다. 만노군, 그러니까 지금의 진천군 태수였던 아버지 金舒玄(김서현) 공이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어머니인 萬明부인이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신기한 꿈을 꾼 후 임신 20개월 만에 낳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곳은 사적지 제414호로 말을 훈련시켰던 馳馬臺(치마대), 식수로 사용하던 蓮寶井(연보정)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사서들에는 김유신 장군의 유소년기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은 ‘진천에서 태어나셨다, 13세 때 경주로 가셨다, 그 다음에 15세 때 화랑이 됐고 17세 때 심신수련을 하고 18세 때는 화랑이다’ 이런 기록은 나오는데 진천에서의 성장 기록이 없습니다. 안타깝죠. 그래서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면 많은 분들께서 오셔서 그럼 진천에서 뭐하셨냐 이렇게 물어보시면 기록이 없으니까 설명을 해드리지 못해 난감한 겁니다.
길상사에 있는 영정에 대한 기록을 다시 찾아보니까 이렇게 돼 있네요.
‘김유신 장군은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 왕의 12세손으로 시조 할머니인 허황후가 인도 사람인 관계로 남방계 혈통으로 표현하였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군의 얼굴표정을 참조하고 후손 삼십 인의 얼굴을 합성하여 표준얼굴을 최종확정하였다.’
진천은 인구가 6만 2000명입니다. 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작은 편인데 우리나라 안에서도 충청북도가 가장 작습니다. 그 충청북도에서 가장 작은 郡(군)이 진천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진천을 한 번 돌아보고 가시면서 느끼시게 되는 것이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할 때 진천을 丹田(단전)이라고 말하십니다.
오늘 견학에서는 진천의 어떤 정신, 문화의 어떠한 근원 같은 것을 느끼고 가시면 될 거 같구요, 그 대표적인 부분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진천의 많은 유적들이 되겠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신라가 진천을 끌어안으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천에 철제련시설, 지금으로 말하자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련시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 제련시설 유적을 발굴하다 그대로 땅에다 묻어두고 포항제철과 산학협력으로 발굴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설을 보면 아래에는 백제 유적이고 위에는 신라 유적입니다. 이 시설이 원래 백제 것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1세기인 지금도 철을 다루는 나라가 강국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전에 철이 얼마나 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그 당시 철을 제련하는 시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유적들이 진천에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 장소로 가시죠.



4. 우리 민족은 삼국통일에서 시작됐다

“삼국은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 민족이란 개념은 15세기 이후 서양에서 생긴 것이다.”

편집자注: 4편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와 그의 탯줄을 보관하고 있다는 지역을 둘러보면서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가시는 곳은 김유신 장군 탄생지입니다. 진천에서 남서 방향으로 약 4㎞ 떨어져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1999년 6월 11일자로 사적지로 지정됐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生後 1400년 후입니다. 그렇게 역사적 중요인물의 탄생지가 1400년이 지난 후에야 사적지로 지정될 정도로 우리가 역사의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적지로 지정이 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베는 것도 모두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군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5년 동안 탄생지 정화사업을 그렇게 했어도 해놓은 게 없다. 화장실 두 개 지은 거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진천에서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복원하려고 합니다만 복원계획을 문화재청에서 승인을 안해주고 있습니다. 승인을 안해주는 이유가 첫째 지표조사를 해보라, 두 번째는 그 당시의 유적을 복원하는 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가다보시면 ‘왜 하고 많은 넓은 지역을 놔두고 김유신 장군 어머니인 만명부인께서-지금으로 말하자면 神的 능력이 있다는 분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터를 잡으실 때 만명부인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했을 경우에-왜 거기다가 터를 잡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 진천군에서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냐면 ‘김유신 장군께서 계양마을 담안방에서 태어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담안방이라는 말의 의미는 큰 울타리 안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 쪽에 보이는 산이 태령산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台(태)를 묻었다고 해서 태령산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왕족들은 台(태)를 모셨고 평민들은 台(태)를 태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태실 유적들이 남아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태실만큼은 못건드렸다고 합니다. 중부 지방에 태실이 네다섯 개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김유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왕들의 태실이라고 합니다.
지금 천안 연구소에 계신 곽춘근 선생님은 ‘太古史(태고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환인께서 환웅에게 神市(신시)를 건설하고 홍익인간을 실천하라고 하시면서 天符印(천부인) 세 개와 삼천 무리를 내려주시고 신시를 열 때 風伯(풍백), 雲師(운사), 雨師(우사)가 다스리던 세 개의 지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 풍백이 다스리던 신성한 고장의 중심지가 지상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지상마을에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신 겁니다. 이런 설명의 근거가 되는 부분은 초기에 신시를 세운 위례성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 먼저 정립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곽춘근 선생님께서는 천안 북면이 위례성이라는 근거로 쓰신 겁니다. 풍백, 우사, 운사가 다스리던 지역이 진천, 안성, 천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안, 진천, 안성 세 개 시군이 행정협의체를 구성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용역조사를 지금 추진 중에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이 김유신 장군 생가터로 1999년 6월에 사적지로 지정된 부분입니다. 저기 보이는 부분 대략 7만 평이 사적지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生家(생가)는 없습니다. 생가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문화재청으로부터 승인을 못받은 상태구요. 그렇다면 생가는 어디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 200~300m 떨어진 곳에 蓮寶井(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연보정이 삼국시대 때 쌓은 유적입니다. 경주에 있는 財買井(재매정)이라는 우물과 같은 양식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우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니까 먹는 우물에 적이 毒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물을 적들로부터 항상 보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물을 담 안에 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이 김유신 장군의 생가라고 추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탄생지로 지정된 게 1999년 6월 11일입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고 역사적 평가 같은 부분에서 우리 후손들이 너무 등한시해 죄를 지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길상사는 원래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길상산에 있었습니다. 원래는 길상산으로 불렀을텐데 그 후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으면서 지금은 태령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순신 생가는 역사상 성역화해 놨는데 김유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김유신과 이순신을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고 이순신은 비장한 생애죠. 장엄하다는 건 성공 스토리고 비장하다는 것은 비극이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았다면 틀림없이 모함에 걸려 제 명을 다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이순신은 국가, 임금인 선조가 지원을 잘 안해줘 독자적으로 외롭게 싸웠습니다. 게다가 나라에서는 열심히 싸우는 사람을 불러들여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순신도 나중에는 자살하는 심정으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김유신의 신라는 조선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줬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에 대해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고 김유신 전기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김유신이 하자는대로 해줬기 때문에 거기에 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고 하자는대로 하니까 통일을 하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군인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난 장군은 성공했고 조선조처럼 군인을 멸시하는 시대에 이순신이 나오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 난중일기 같은 걸 읽어보시면 답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즉, 김유신은 오래 사셨고 하고 싶은 것 다했고 하는 그런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비극적으로 죽은 분을 추앙해야 균형이 맞는 면도 있죠. 성공한 사람은 나중에 천천히 해줘도 되구요. 이 정도 보고 주변을 둘러보세요.

신운철: 이것이 흥무대왕 遺墟碑(유허비)입니다. 이것은 태종무열왕의 유허비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 유허비의 글은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지으신 겁니다. 최남선 선생은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와 탄금대 신립 장군 유허비의 비문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비석에는 흥무대왕 김유신 유허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허비란 공적을 이렇게 기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巨頭(거두)라고 하면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 한 분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십니다.
두 분은 김유신 장군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육당 최남선 선생은 김유신 탄생비를 쓰기 위해 진천에 거의 와서 살다시피 하셨다고 합니다. 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시대라는 상황 때문에 김유신 장군에 대해 안좋은 쪽으로 많은 글을 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립투사로 알려져 있고 육당 최남선 선생은 친일행적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재 역사학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주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큰 흐름 자체에서도 그런 부분이 약간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기 유허비에도 그런 부분들이 나옵니다. 어떤 부분들이 나오냐 하면 ‘論者(논자)가 或(혹) 新羅(신라)의 統三(통삼)에 唐(당)의 兵威(병위)를 假(가)한 것이 民族觀念上(민족관념상) 如何(여하)하랴를 難(난)하지마는 본디 民族觀念(민족관념)은 西洋第十五世紀(서양제십오세기) 以降(이강)의 社會的(사회적) 産物(산물)로서 東洋古代(동양고대)에는 그 語句(어구)조차 發見(발견)되지 않는 것이니 저 唐(당)의 創業平難(창업평난)에 여러번 突厥回紇(돌궐회흘)의 外兵(외병)을 借用(차용)하였음이 唐(당)의 帝業(제업)의 疵類(자류)가 되지 않고 西洋中世紀(서양중세기)의 國家發達(국가발달)에 예사로 各國傭兵(각국용병)을 援用(원용)하였다 해서 그것을 貶薄(폄박)할 수 없는 것처럼 後世(후세)의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標準(표준)으로써 古代(고대)의 自國至上的(자국지상적) 國民倫理(국민윤리)를 逆推(역추)함은 결코 平論(평론)이 아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이 말이 아주 중요한 겁니다. 신채호는 신라가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고구려, 백제를 쳤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만 그 당시 신라가 당나라에 합병된 것이 아닙니다. 또 당나라가 신라까지 침략하려고 하니까 신라가 당나라를 쫓아낸 거 아닙니까.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국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런데도 한반도를 차지하려던 당나라를 내쫓은 그 부분은 이야기를 안하고 ‘당의 힘을 빌렸다’는 부분만 강조하는 겁니다. 두 번째 삼국이 같은 민족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백제, 고구려, 신라는 같은 민족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최남선이 민족이라는 개념이 언제 생겼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서양에서도 15세기에야 비로소 생긴 개념이지 6세기, 7세기에는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싸운 것 아닙니까. 즉, 통일한 다음에 민족이 생긴 겁니다.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민주주의가 없었던 세종대왕 시절에 세종대왕보고 ‘왜 당신은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 라고 욕하는 것하고 똑같다는 말입니다.

신운철: 여기를 마무리한 다음, 보탑사에 있는 통일대탑으로 갈 겁니다. 이 글의 흐름을 보시면 제일 끝이 ‘統一一念(통일일념)이 千秋(천추)에 相照(상조)하나니 此碑此記(차비차기)가 한갖 一片述古(일편술고)의 文(문)에 그칠 것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하셨단 말이에요.
이곳 진천이 한반도를 몸으로 봤을 때 단전이고 기가 모인 곳인데 통일대탑이 이곳에 섰습니다. 지금 통일의 기운이 움트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 보탑사로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아시겠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이 신라 통일의 뜻을 담은 것인데 9층 목탑을 세우고 20년 만에 신라가 통일이 된 겁니다. 진천에 통일대탑이 섰는데 30년 안에 통일이 될 겁니다.



5. 보탑사 통일대탑과 통일 기원

"통일대탑은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탑으로 황룡사 9층목탑의 양식과 그 뜻을 계승"

편집자注: 5편에서는 보탑사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 만든 통일대탑에 대해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곳의 지명이 상계리입니다. 아까 제가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 계양마을 담안방이라고 그랬죠? 그 때 지명이 그대로 내려온 것입니다. 지금 여기 상계리에서 넘어가는 이 곳이 연곡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통일대탑인데 탑이 있는 곳이 연곡리 보련마을입니다. 통일대탑이 있는 부분은 원래 절터가 아니었나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통일대탑은 1996년에 本殿(본전)이 완공됐습니다. 그 당시 지역신문에서 정리보도한 내용 중에서 통일대탑에 대해 설명하면서 마무리를 어떻게 했냐 하면 ‘중부 지역에 남은 마지막 명당터다’ 라고 돼 있습니다. 한 번 가서 보시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정말 명당터라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가보면 마을 이름이 보련 마을인데 연꽃 蓮자를 쓸 만큼 주변의 열두 개 산봉우리들이 통일대탑을 감싸고 있고 그 중심에 탑이 꽃술처럼 서있습니다.
통일대탑은 우리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쌓은 탑입니다. 통일을 기원한 대표적인 탑으로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는데 통일대탑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축양식과 그 뜻을 계승한 탑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대략 80m, 9층이었습니다. 통일대탑은 3층이고 높이는 약 42.7m입니다. 옛날 건축양식대로 못 하나 안박고 그대로 쌓은 탑이에요. 신라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고 23년 만에 삼국통일의 뜻을 이룩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예측하시는 분들이 30년 안에 통일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데 저도 거기서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대탑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건축양식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걸 종교적인 시설로 보지 말고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통일대탑이 어느 정도의 시설이냐 하면 1층, 2층, 3층에 四方佛(사방불)-동서남북으로 부처님을 모셨습니다-이 있는데 동쪽 약사여래像 앞에 4월 초파일이면 수박을 쌓아놓습니다. 그런데 그 4월 초파일에 쌓아놓은 수박이 동짓날이 되도록 썩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원래 수박은 수분이 95% 이상 되는 과일이다 보니 냉장고에 넣어놔도 썩어요. 그런데 6,7개월 동안 밖에다 놔둬도 썩지를 않습니다. 이 수박을 동짓날에 잘라먹는데 수박을 먹고 병이 나았다고 소문이 나면서 동짓날이 되면 사람들이 이 수박을 얻어먹으려고 줄을 섭니다. 여러분들께서 가보시면 지금도 수박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가면 경주가 다 보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걸로 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사람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탑이었다는 거에요. 이 통일대탑도 사람이 내부에서 걸어 올라가 전망을 볼 수 있는 탑입니다. 일단 개요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이곳이 통일대탑이 있는 보탑사입니다. 이 절의 이름은 보탑사이고 본전을 통일대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는 본절이 서울에 있는 삼선포교원이라는 곳입니다. 절은 절입니다만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도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오십니다.
이것은 진천 연곡리 비석입니다. 白碑(백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시다시피 비석에 글씨가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의 건국을 예언한 도선 국사가 우리나라의 吉地(길지)에 백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백비가 네 개 정도 발견됐다고 하는데 그 중 진천에서 발견된 백비가 가장 큽니다. 이 비석은 일제 시대에 발견돼 보물 404호로 지정됐습니다. 일부에서는 비석의 글씨가 마모된 게 아니냐 말씀하시는데 마모된 것과 글씨가 없는 것은 틀리죠.
이 비에 대해서 추가로 두 가지 설명드릴 것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비석을 세울 때 그 바닥에 거북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비의 받침 거북은 다릅니다. 거북이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말이 뭐냐하면 이렇게 보시다시피 허물을 벗고 있어요. 허물을 벗는 부분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면 석공이 돌에 정을 잘못치면 돌이 얽먹는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돌이 허물벗듯 떨어져 나간답니다. 신기한 것은 돌이 벗겨진 부분은 밋밋해야 하는데 그 안쪽에도 같은 무늬가 남아있는 겁니다.
이 거북이 언제부터 허물을 벗기 시작했냐 하면 통일대탑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일전에 어떤 손님께 그 부분을 설명드렸더니 ‘이 거북이는 살아있는 거북이다’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허물은 언제까지 벗습니까’ 물었더니 ‘20~30년 걸릴 거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물어보니까 ‘이 돌이 하얗게 변할 거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지금 나이가 사십쯤 되니까 저는 이 거북이가 허물을 다 벗고 비석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살아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분의 말씀이 맞는지 확인해볼 겁니다.
그 다음에 여기 보시면 아까 흥무대왕 유허비에서도 보셨듯 비석 아래부분은 거북이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 아랫부분은 보통 거북이가 아닙니다.
여기 보시면 얼굴 앞쪽이 깎였죠. 진천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훼손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까 거북이가 살아있다고 설명하신 그 분은 이걸 보고는 ‘머리 부분이 말인 것으로 봐서 이건 天龜(천귀)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천귀라고 하십니까’ 물어보니까 과거 중국에서 황하가 큰 홍수로 범람해서 둑에 물이 스몄다고 합니다. 거기서 여러 조형물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몸통은 거북인데 머리는 말인 거북이가 출토됐었다고 해요. 그 조형물은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상상의 동물, 하늘에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천귀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그런 부분에 근거해서 이 조각이 이뤄진 것이지 그냥 이뤄진 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백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비가 왜 비문을 새기지 않고 그냥 놔뒀을까. 이 부분은 후손들이 기록하라고 우리 조상들께서 남겨놓으신 거에요. 그렇다면 현재 살아가는 우리가 남길 게 뭐가 있겠어요. 통일이죠. 통일되면 그 기록을 여기에 남길 거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 비석이 안씌어 있다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진천은 가장 작은 군이지만 이렇게 통일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 꿈이 꿈틀대는 곳입니다. 통일대탑이 그냥 지어진 게 아닙니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이 곳에 통일대탑이 들어섰겠습니까.
이제 통일대탑으로 들어가 보시죠. 여기는 1층이구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사방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방불을 모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방불을 모시는 곳을 잘 못봤어요. 남쪽에 계신 분이 석가여래, 동쪽에 모신 분이 약사여래 부처님입니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인간의 病事(병사)를 주관하시는 부처님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수박은 다른 불상 앞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고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동쪽에서만 그렇습니다.
여기 놓인 수박들이 사월 초파일에 올려놓아가지고 동짓날, 대략 7개월 정도 지난 다음에 자르게 됩니다. 여름과 똑같이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보존이 됩니다.
지금 여기 보시면 중심추, 心柱(심주)라고 하는데 심주의 칸이 이렇게 쳐있고 탑이 서있죠. 심주의 칸은 서른 세 마디로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허리가 서른 세 마디로 돼 있다고 해서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 심주 밑에는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이 부분들은 모두 못 하나 안박고 전통방식대로 짜올린 부분이구요 이렇게 사람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게 지어진 것입니다. 올라가시죠.
이 탑을 오르면서 보시면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실제로는 각 층의 중간에 층이 있습니다. 이 부분들이 사람이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층으로 따지면 전체가 5층이에요. 외부에서는 3층이구요.
여기는 2층이구요 法寶殿(법보전)이라고 해서 불경이 보관돼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여기 있는 것은 문상대인데 아까 보신 심주와 연결돼 있는 거에요. 이걸 돌리면서 소원을 빕니다. 그런데 이 문상대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돌리면 훼손될까봐 지금은 돌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팔만 대장경이 들어 있습니다.
이 탑을 짓는 데 태백산에서 자라는 紅松(홍송)을 8톤 트럭으로 150대분을 가져와서 지었다고 합니다. 그 홍송을 주재료로 해서 백두산, 한라산 등 팔도의 주요 지역에서 나는 나무를 모두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갑제: 春陽木(춘양목)이라고 그럽니다. 강원도 태백에서 나오는 나무들은 경북 춘양이라는 곳에서 모아서 보내기 때문에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下에 계속>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이 곳은 마이크를 안써도 거리와 상관없이 들을 수 있게 만든 강의실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잘 들리실 겁니다. 여기 전시된 그림과 사진들은 전세계의 탑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 사진이 초기의 불탑 형태라고 합니다. 인간이 불탑을 만들게 된 이유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사람이 걸어 올라가게 만든 탑, 예를 들면 황룡사 9층 목탑같은 것이 어떻게 사람이 걸어올라가게 만들었을까, 내부에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은 각 층의 중간 단계에 이런 어떤 暗幕(암막) 형태가 있기 때문인데 그 부분을 이 암각화에서 나름대로 비밀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아까 말씀드린 대로 1층과 2층 사이, 2층과 3층 사이에 암막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황룡사 9층 목탑이구요, 높이가 약 80m 정도 된다고 하니까 통일대탑의 두 배 정도입니다. 높이가 두 배면 밑의 면적은 훨씬 넓었겠죠.
목조 건물이 얼마나 보존이 어려우냐 하면요, 이 부분이 공사한 부분인데 불에 그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에 타기 전에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 설계도에 따라 불에 타기 전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하거든요. 통일대탑은 이런 화재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건물 곳곳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법륜사 목탑입니다. 일본의 탑 형태와 우리나라 탑 형태를 비교해보시라고 붙여놓은 사진입니다. 틀리죠? 왜 틀리냐 하면 우리나라 목재와 일본의 목재는 그 강도가 틀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고 우리나라 전통의 탑 형태를 흉내낼 수 없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큰 시설을 보면 이것의 두세 배 되는 나무가 있어 입이 딱 벌어진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목재 중에서 우리나라 나무가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게 되면 나무에다 전부 종이라든가 천 같은 것으로 감싸놨다고 합니다. 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중국 나무는 갈라지면 처음부터 끝까지 쫙 갈라지기 때문에 건물의 안전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 나무는 갈라지다가도 가다가 멈추기 때문에 안전에는 큰 영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물을 목재로 지었을 경우 천년 이상 갈 수 있는 나무는 우리나라 나무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시설도 천년은 갈 수 있는 시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불에 잘 안타죠, 나무가 우리나라 나무기 때문에 천년 가죠. 또 뭐가 있을까요. 해충? 지진? 맞습니다. 지진. 이 탑은 어떻게 내진 설계를 했냐 하면 주춧돌에다가 1㎜ 정도의 모래를 깔았대요. 그 위에 기둥을 세웠기 때문에 만약에 지진이 나면 주춧돌은 주춧돌대로 움직이고 기둥에는 영향을 안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진설계도 돼 있죠. 화재 위험 없죠.
통일대탑이 문을 여는 날, 1000~1500명이 왔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걱정을 했답니다. 1000명 이상 들어가는데 붕괴위험은 없겠냐. 그러니까 탑을 지은 분께서 ‘대개 사람들이 나무보다 콘크리트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지금 올라오신 인원의 두 배가 올라와도 끄떡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1층, 2층, 3층을 뚫는 부분입니다. 앞에 보이는 부처님은 미륵불이에요. 그런데 보통 어떤 절에 가든지 가장 높은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십니다. 이 통일대탑의 가장 높고 귀한 자리는 이 자리에요. 일전에 어떤 손님께서 오셔서 왜 이 자리에 석가모니를 안모시고 미륵불을 모셨는지 주지 스님께 여쭤보시더라구요. 주지 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미륵불께서 미래에 오시라고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그러시더라구요. 미륵불은 아시다시피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잖아요. 이 부분이 花郞(화랑)하고 어떤 관련이 있느냐. 옛날에 신라 사람들은 화랑도를 미륵불로 믿고 살았었습니다.
이 통일대탑을 지을 때는 다른 절을 지을 때처럼 한두 사람이 많이 시주해서 지은 게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조금씩 시주를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시주를 하신 분이 혼자서 이 미륵불상을 시주하셨다고 해요.

조갑제:이 탑을 짓는데 예산이 40억 원 정도 들었다고 들었는데요.

신운철:대략 40억 원 정도에서 50억 원 정도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 보면 난간이 탑 주위를 빙 둘러 있습니다. 이 난간을 돌면서 소원성취를 비는 탑돌이를 하죠. 원래는 탑돌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안전 문제 때문에 못하게 합니다. 이 난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의 산들이 연꽃잎처럼 이 탑을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탑의 丹靑(단청)을 하신 분도 우리나라 최고의 단청 전문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단청이 상당히 단아하다는 평가를 많이 합니다. 이 단청은 바람과 구름과 연꽃만 이용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단청을 만들 때도 사연이 있습니다. 탑 공사를 감독하시는 분께서 그 분께 단청을 맡기려고 찾아갔더니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계시더랍니다. ‘야, 내일모레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가서 단청을 하냐’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도 그 분께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공사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입원해계시던 그 분이 ‘그러면 내가 죽더라도 거기서 죽을 테니까 한 번 해보자’ 해서 이 단청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단청을 하고 나서 건강해지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바깥에 가서 위를 보시면 탑 꼭대기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금빛이 안나요. 그 이유가 뭐냐하면 옻나무가 번개를 안맞는다고 해서 옻나무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조들께서 건물을 지으실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외부로부터 호랑이 등 침입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막기 쉬운데 제일 힘든 게 뱀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원주택 지을 때 그 옆에 산이 있으면 뱀이 들어온데요. 옛날 사람들은 뱀을 어떻게 막았느냐 하면 집을 조금 높게 짓고 그 아래에 돼지를 길렀대요. 뱀의 천적이 돼지래요. 돼지는 독사가 물어도 꿈쩍도 안하고 뱀을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지금 내려갈 때 보시면 여기 건물 자체가 우리나라 원시건물 樣態(양태)부터 고려 시대,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을 조금씩 따르고 있어요. 그래서 건축양식을 연구하러 오시는 분도 여기 오셔서 우리나라의 시대별 건축양식을 보고 배울 정도입니다. 이 탑이 어느 정도의 건축수준이냐 하면 각국의 기술자, 전문가,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여기 온 일본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니네들 이 정도 목조건물을 지을 수 있냐’ 물어보면 전문가와 학계 사람들은 못짓는다고 말한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우리 인구가 10억 명이 넘는데 찾다보면 있지 않겠냐’ 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사람이 걸어서 올라올 수 있고 强度(강도)나 引張(인장)부분 등이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1500년 전에 이것의 두 배, 규모로 따지면 이것의 열 배 정도 되는 건물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냐면 이 건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1층에 가서 보시게 되면 현판을 걸어도 1층은 조금 기울어집니다. 2층에 가면 현판이 거의 45도 기울어집니다. 3층에 가면 현판이 거의 누워버립니다. 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걸 9층을 쌓았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1층을 쌓을 때 세 배의 노력을 해야 3층을 쌓는 게 아니라 1층 쌓을 때 30배의 노력을 해야 3층을 쌓는다고 해요. 그런데 신라 사람들은 9층을 쌓았어요. 그것도 사람이 걸어올라가게 말이죠. 지금 저희 군수님께서 오셨네요.

김경회 진천군수: 안녕하십니까. 진천군수 김경회입니다. 상미회 회원 여러분들과 의미가 있는 인연을 맺게 된 이 만남이 소중한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조갑제 기자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여러분들께서 오신다고 했는데 제가 오늘 미처 시간을 못비웠습니다. 그래서 신운철 계장이 안내를 맡게 됐습니다.
제가 진천 군수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1982년부터 김유신 장군께서 어떤 통일 정신을 가졌었느냐 하는 생각을 되새기고자 여기에다 통일기원탑을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회용 카메라를 가지고 김유신 장군 탄생지 주변의 연보정이라든가 연곡리 석비라든가 태실 등의 유적지 기록을 남기고 1980년대 중반에는 신영훈 선생이나 이런 분들을 제가 만나서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 절터는 원래 사유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탑을 짓는 게 어려웠습니다만 마침 4800여 평이 거래되는 것을 소유주와 협의해 매입하면서 이 건물이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1996년에 불탑이 완공됐습니다. 財源(재원)에 대해서는 신운철 계장에게 말씀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탑은 1500년대 이후에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지 못했던 기술을 21세기에 다시 살려내 집대성한, 한국의 고건축술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탑이 들어선 보련마을은 많은 학자들과 풍수연구가들이 와서 이 지역을 一乘地支(일승지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은 저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박이 썩지 않는다거나 백비의 돌거북이가 허물을 벗는 현상이 생긴다든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정립해나가야 할 그런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많이 어지러운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할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고명하신 우리 지도자님들께서 정말 이 사회가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사천만, 칠천만 동포가 그 시대정신을 갖고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때에만 장래에 대한민국이 어떤 새로운 꿈과 비전을 펼쳐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대정신은 삼국시대의 화랑정신, 고려시대의 抗蒙(항몽)정신에서 남은 유산은 딱 한 가지 있지 않습니까. 팔만 대장경, 조선시대의 忠義정신, 구한말의 獨立정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지도자들이 ‘이 민족이 어떻게 해야 미래에 발전할 것인가’ 하는 뭔가를 만들어놔야 나중에 후손들에게 ‘야, 이놈들아. 그래도 우리는 이것은 해놓지 않았느냐. 너희도 좀 잘해라’ 이렇게 지도할 수 있는 조상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대정신이 발현되기를 간절히 염원을 해봅니다.
저희 진천에서는 가로수도 전부 무궁화 나무로 바꿨습니다. 무궁화 나무의 다른 이름이 天地花라고 합니다. 무궁화 나무는 開花기간이 지구상에서 꽃피는 나무 중에서 가장 길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지화가 어떻게 우리 민족의 민족화로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미를 모릅니다. 이 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신라 화랑들은 가장 모범이 되는 화랑을 선발하면 무궁화를 머리에 꽂아줬답니다. 그 모범화랑에게 무궁화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주면서 천지화랑이라고 命名(명명)했습니다. 천지화랑에겐 신라의 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화랑들이 목숨바쳐 싸울 수 있는 거죠. 훈련이든 전투든 1등을 하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겠죠.
그럼 그 화랑이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떻게 해줬느냐. 임금이 八關會(팔관회)를 열어줬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 거라고 봅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도 지금 우리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죠. 당시 신라는 아주 조그만 나라였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外戚(외척)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고 골품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권력을 가진 사돈이 있으면 지금도 군대 안가잖습니까. 우리 장인이 누군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누군데 하면서 안가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골품제도가 생긴 겁니다.
지금 우리가 신라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에게 배운 겁니다.
저는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신라의 역사를 읽어보면‘야, 이렇게 신라사람들이 똘똘 뭉쳐있으니까 그 거대한 강성국가인 고구려를 섭렵하고 백제를 섭렵하고 삼국통일을 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싸움터에서 죽으면 임금이 나와서 내 아들 제사 지내주고 가족들 뒷바라지 다 해주는데 목숨 안바칠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이 신라 팔관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종교적인 행사로 평가절하해서 ‘그건 불교에서 하는 거야’라고 과소평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국제결혼을 제일 먼저 했던 민족입니다. 2200년 전에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라에서 장보고가 태어난 거죠. 우리가 연속극은 보지만 장보고가 왜 태어났냐는 사실은 모르고 있거든요. 장보고가 왜 태어났습니까.
장보고는 동남아시아를 섭렵하면서 중국에 가서 벼슬도 했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는 중국 땅이 곧 우리 땅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스스로 비하하는 역사만 배운 겁니다. 상식적으로 여기서 쫓겨난 사람이 중국에서 어떻게 벼슬을 합니까. 거기도 내 나라, 내 피가 흘렀고 내 힘이 미쳤으니까 가서 벼슬을 했지 않겠습니까.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쫓겨 나왔다는 것은 드라마 내용일 뿐입니다. 장보고 장군이 동남아시아 전체를 섭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야국이 서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동남아를 제패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인도의 알마타 왕이 딸을 주죠.
이런 예에서 보듯이 신라는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나라인데도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강자에 의해서 쓰여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공을 안바친 지 100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중국 사람들이 왜곡시킨 역사를 배우면서 그게 제일인 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인 지금 우리가 먹고살 만큼 됐지 않습니까. 이제는 고대에 치우 천황이 중국의 始祖를 전쟁터에서 사로잡아 무릎을 꿇게 하고 항복시켰던, 그런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치우가 누구냐. 환웅 시대의 열네 번째 임금입니다. 열네 번째 임금이 만주벌판에 가서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을 무릎꿇게 하고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빨리 교과서에 반영하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상식으로 통용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그 커다란 가슴을 물려받을 수 있고 어디에 가서 경쟁할 때도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지 맨날 얻어맏는 것만 가르치고 중국은 대국이라고만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중국은 한반도를 天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 말씀은 왜 우리가 그런 역사를 가지고도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느냐는 거죠.
지금 중국에서는 동북 3성을 자기네 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단군을 완전히 신격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단군이 어디 神입니까, 사람이지. 중국의 미래학자들은 단군을 신격화시키면 중국이 동북 3성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우리나라가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봅다. 제 말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조갑제: 군수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신운철: 군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사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청동기 시대를 대략 3000년 전이라고 배우는데 일본이 자기네 청동기 역사를 4000년으로 맞춰놓고 우리나라 역사를 맞추다보니까 우리 한민족의 청동기 역사도 거기에 맞춰 줄어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은 그 부족장이 죽으면 만드는 무덤입니다. 지구상에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지구상 고인돌의 50%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는 거대한 부족이 이끄는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의 기원설이 북방 기원설, 남방 기원설만 있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자생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후손들이 고민해야 할 사항 중 하나인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치우천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 곳에 계시느냐 하면 여러분, 우두머리라는 말은 아시죠. 소 牛자, 머리 頭자를 써서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우두머리라는 말은 어떤 무리의 최고지도자를 말하는 겁니다. 이 우두머리라는 말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치우천황의 투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치우천황은 전투 중에 청동투구를 썼는데 그 투구에 소뿔 두 개를 달았답니다. 그때부터 생긴 말이 우두머리라는 겁니다.
우두머리의 모델인 치우천황은 실존인물입니다. 왜 실존인물이냐 하면 중국에 가면 치우천황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지금도 중국에 가서 치우천황에 대한 말을 꺼내면 사람들이 차렷 자세로 듣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전쟁의 神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중국 사람들은 신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70여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치우천황은 전쟁에서 焰硝(염초)와 硫黃(유황)을 썼다고 합니다. 염초는 안개를 일으키고 유황은 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황을 번개를 일으키고 안개를 일으키는 신으로 알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깃발 문양도 치우천황 문양이에요. 이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어요.
치우천황을 우리 고대역사에서 환인, 환웅, 단군으로 따졌을 때 14대 환웅이라고 합니다. 이 14대 환웅이 실존인물인데 우리는 그 아랫대인 단군을 신화라고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도 교과서 자체도 다시 써야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를 아까 군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치우천황이 누구와 싸웠느냐 하면 중국의 黃帝(황제) 軒轅(헌원)입니다. 치우천황은 동이족, 조선족이고 중국 황제 헌원은 중화족입니다. 황제 헌원은 중국을 세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헌원하고 싸운 치우천황은 우리나라의 15대 환웅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 역사가 오래됐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더 오래됐다는 말이죠.
중국의 기록에도 치우천황하고 황제 헌원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과 치우천황은 동이족이라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우리는 지금 역사를 그렇게 안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황제 헌원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부분이 뭐냐하면 우리는 황제를 임금 皇자로 생각하는 데 그게 아니라 누를 黃자를 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누를 黃자는 五行에서 색깔로 따지면 중앙을 의미한다고 해요. 중국 고대에 五帝, 즉 다섯 제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운데 있었던 제후인 황제 헌원이에요. 그 사람이 중국의 시조에요.
이런 부분을 우리 후손들이 더 연구해서 우리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말씀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6. 신라통일龍華寺 석불입상과 농다리 이야기

“龍華는 김유신 장군을 말하는 겁니다. 예부터 이 불상은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頌德불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편집자注: 6편은 용화사 석불입상과 농다리에 대해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신운철 계장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신운철 진천군청 문화관광과 계장: 지금 가시는 곳은 진천 용화사 석불입상이 있는 곳입니다. 이 절과 불상은 화랑이나 김유신 관련 유적으로써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이 불상은 頌德(송덕) 불상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구요, 저희는 김유신 장군이 神劍(신검)받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불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돌아가신 지 160년이 지난 후 김유신 장군께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증됐습니다. 추증할 당시 대규모의 어떤 기념집회가 있었겠죠. 그리고 추증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기념물을 세웠을 거라고 추측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런 기념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천에서 더 보셔야 할 것이 籠(농)다리입니다. 시내에서 한 4㎞ 거리에 있습니다. 차로 이동하면 한 10분 걸립니다. 지금 안내하시는 분들이 시간상 어렵겠다고 하셔서 가지는 않고 일단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농다리는 고려 초에 쌓은 다리입니다. 옛날 다리들은 징검다리였습니다만 지금 다리는 교각을 세워서 상판을 얹잖아요. 그 상판을 얹는 다리의 초기 형태로 보시면 될 거에요. 거기에 다리 교각으로 사용한 돌을 紫色(자색)돌이라고 하는데 색깔이 붉은색입니다. 자색돌로 교각을 쌓은 뒤 상판을 얹은 다리에요. 그게 고려 초부터 1000년 정도 이어온 다리입니다. 다리 규모가 상당히 커요. 약 100미터 정도 되는 다리인데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만 이 다리가 고려시대에 쌓은 거냐 삼국시대에 쌓은 거냐를 가지고 진천에서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商山誌(상산지)」에 보면 고려 초에 임희 장군께서 쌓았다는 기록 때문에 고려 초에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다리는 세금천이라고 하는 하천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청주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곳이 교통 요충지이면서 전투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다리는 아니라도 그 이전에 원형의 다리는 있었고 고려 초에 만든 것은 그 다리를 보강발전한 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년에 한 번씩 농다리 축제를 합니다. 그 위에 상여가 지나가요. 농다리는 대나무 竹변에 龍을 씁니다.
이 농다리를 지네다리라고도 하는데 모습이 마치 지네처럼 생겼어요. 이 다리와 관련해서 용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과 관련된 행사도 전해져 내려와요. 이 때문에 원래는 龍다리인데 누군가가 격하시키느라고 대나무 竹 변을 붙여서 籠(농)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이런 학설도 있습니다.
태고사를 만든 분의 학설에는 이런 설명도 있습니다. 옛날에 철기가 없을 때는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래서 대죽자가 붙은 글자는 모두 무기를 말한대요. 그 다음에 龍자는 군사라는 의미랍니다. 그래서 대죽자 밑에 용龍자가 있으면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지키던 곳이다. 그래서 籠자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이것이 용화사 석불입상입니다. 이 불상은 만들어진 지 약 1000여 년 된 겁니다. 龍華(용화)라는 단어가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 불상 자체가 김유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불상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대웅전은 처음부터 있던 건물이고 그 옆의 건물이 금년도에 새로 완공된 건물일 겁니다. 오늘 진천에서 보실 중요한 곳은 다 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7. 삼국통일의 단초가 된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은 아들 여창을 문병하러 심야에 50명의 기병대만 데리고 가다 이곳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참수됐다.

편집자注: 7편은 충북 옥천의 관산성 터에서 조일권 옥천 문화원 이사로부터 관산성에 얽힌 신라와 백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조일권 충북 옥천문화원 이사·향토사학자: 안녕하십니까 조일권입니다. 저는 현재 옥천문화원 이사로써 향토사 중 山城(산성)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 제가 짧게나마 옥천의 역사와 관산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다시피 충청북도 옥천군입니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古尸山郡(고시산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때 관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에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 때 옥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은 백제 성왕의 죽음 때문입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지역을 차지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羅濟 동맹이 깨지고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관산성을 침공한 신라군과 싸우다 잡혀 죽음으로써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날씨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 11시 방향으로 보시면 약간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저 산에 성벽 자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둘레 약 900미터 정도의 성터가 있습니다. 1500년 전에 큰 전투가 있을 당시에는 성벽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무너진 돌들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올라가시면 막상 볼 게 별로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성왕이 구천에서 신라 장수 도도에게 잡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희 옥천의 관산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구진벼루라는 절벽이 있습니다. 벼루라는 말은 벼랑의 사투리입니다. 지금 현재 학계에서는 거기에 나오는 구천과 이 지역에 있는 구진벼루라는 지명을 유추해 백제 성왕이 전사한 장소가 그곳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현지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저기 도로공사를 하면서 파놓은 곳들을 보셨는데 저 도로공사가 끝나면 저희 옥천군에서 성왕 戰死碑(전사비)와 그에 대한 안내판을 만든다고 합니다. 3년 정도 뒤에 오시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아무런 안내판도 없어서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우선 이 동네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입니다. 저 마을이 양지마을, 이쪽이 음지마을입니다. 이 부근의 지명은 전쟁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분전이라는 마을이 저쪽에 있고 지금 산을 깎고 있는 저 부분은 말무덤 고개라고 부릅니다. 말무덤 고개라는 것은 말이라는 것을 크다는 의미로 써서 큰 무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쟁에서 말이 많이 죽어서 묻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전쟁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또 저쪽에 보면 殮葬(염장)이라는 지명도 있습니다. 염장이라면 일종의 시체와 관련된 지명입니다. 또 군대가 진을 쳤다는 진터벌 등 전쟁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습니다.
원래는 여러분들께서 마주보는 저 부분에 가셔야 하는데 길이 험하고 막상 올라가도 성벽이 남아있지 않아서 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1600년 전 이곳은 큰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라서 성벽도 대단했을 텐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돌무덤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돌이 있는 걸로 봐서는 꽤나 큰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성은 삼국이 통일이 되고 나서는 전략적 가치가 없어 써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처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요충지였다면 계속 사용해서 성벽이 남아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보니까 관리가 안되고 전부 다 무너져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보시면 저 절벽을 구진벼랑이라고 합니다. 여기 현지에서는 구진벼루라고 부릅니다. 벼루라는 말은 벼랑의 사투리입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성왕이 구천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구천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학계에서는 관산성이 이 부근이니까 구천을 구진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는 서기 554년 신라의 침공으로 羅濟 동맹이 깨지고 성왕이 이 지역을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첫 번째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관산성을 거의 차지했는데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신라의 김무력 장군이 한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정예군을 끌고오면서 전세가 혼전이 됐습니다. 그 상태에서 성왕의 아들, 여청이 이 성에 주둔하면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병에 걸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왕이 다른 곳에 있다가 아들을 문병하러 밤에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신라장수 도도의 매복에 걸려 잡혔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본다면 저 부분이 상당히 협곡인데 아마 저쪽에서 매복에 걸려 가지고 이쪽으로 도망오다가 이 부근에서 잡혔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조갑제: 지난 주에 사전답사를 와서 저 성에 올라갔다 왔거든요. 저 산의 높이가 303미터인데 올라가보니까 성터가 있기는 있습니다. 있기는 있는데 모두 흙에 파묻혀 있고 돌만 조금 남아있습니다. 유적은 삼태기처럼 비대칭형 타원형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쪽까지 올라가려면 굉장히 힘드실 것 같아서 저희가 대표로 올라갔다 왔다고 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방에는 그런 성이 산꼭대기 곳곳마다 있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여기가 삼국의 최전선, 요즘으로 치면 DMZ(비무장지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전쟁 당시 성왕의 아들인 여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위덕왕이 됩니다. 이 사람이 부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3만 명을 이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요즘의 인구로 비교한다면 그때 백제 인구가 많이 잡으면 300~4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니까 요즘으로 치면 몇 십만 명을 동원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신라 진흥왕도 그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 테니까 여기 주변 골짜기마다 군인들이 꽉 메우고 있었을 겁니다.
초전에는 성왕이 좀 유리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왕자인 여창이 아팠습니다. 기록에는 여창과 아버지 성왕의 관계가 좀 서먹한 것처럼 나와있어요. 여창이 아프니까 성왕은 그게 마음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혼자 50명의 기병대를 데리고 가다가 매복을 당해서 잡혀 죽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성왕의 목을 치는 사람으로 누구를 뽑았느냐 하면 아주 비천한 사람으로 하여금 목을 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왕을 노예 출신 장군이 목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백제군의 기를 완전히 꺾기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성왕의 목을 친 곳이 이 근방일지도 모르죠. 하여튼 매복에 걸린 장소가 이 근방이라는 겁니다.
전번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 쪽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었을 텐데 자기편이 도망가고 잡히고 하는 것을 모두 보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때는 핸드폰이 없었잖아요. 멀리서 내려다보면 누구 편인지도 잘 모릅니다.
전쟁이라는 건 참 우습습니다. 전쟁에서는 아군끼리 서로 싸워서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게 混戰(혼전)이라는 겁니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혼란 상태거든요. 경계선 그어놓고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 이런 게 아닙니다. 전부 뒤섞여버리는 게 전쟁입니다. 그래가지고 서로 막 비벼대다가 어느 한 쪽이 유리해지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원래 아수라장입니다.
예컨대 광주사태의 경우에도 보면 진압군이 30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 중 10여 명은 자기네들끼리 오인사격으로 죽은 것입니다. 시민군 200여 명 사망자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튼 백제는 다 이겨버린 전쟁에서 왕이 이런 식으로 죽으면서 패배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군 2만여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백제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백제군에는 백제만 온 것이 아니고 가야군대가 오고, 일본군대가 여기까지 와서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판이 나면서 그 뒤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기록을 하나 뽑아왔습니다. 이상하게 이 관산성 전투는 굉장히 큰 전투고 삼국통일을 준비하게 된 전쟁인데도 삼국사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와있어요. 한두 줄 정도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제일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일본서기라는 것은 730년에 만든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보다 400여 년이 빠른 일본의 正史입니다. 우리의 삼국사기와 같은 책입니다. 거기서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산성 전투는 주로 그 기록에 의한 겁니다. 삼국사기하고 맞춰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때 일본의 천황은 헌명 천황이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야군대가 1만 명 정도 잃고 난 8년 뒤 대가야가 망합니다. 즉 일본 왕족의 고향이 망해버린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헌명 천황이 뭐라고 말했냐는 게 적혀 있습니다. 전부 신라 욕입니다. 신라 때문에 고향이 망했으니까요.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이 미마나가 가야입니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이건 완전히 원한이 사무친 말 아닙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뭐냐하면 신라가 그 뒤에 한반도의 주인이 돼버렸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가야 사람들은 일본의 주인이 된 거 아닙니까. 또 백제가 망한 다음에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많이 갔습니다. 즉 오늘날의 한일 감정의 뿌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서기의 역사관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가야, 백제가 신라에게 가졌던 감정이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한일간의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한국에게 가지는 감정, 자기 고향을 망하게 한 그것을 여기서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헌명 천황이 죽을 때의 유언을 소개해 드립니다.
<천황이 마침 대궐 밖으로 나가있던 황태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들이고 병상 가까이 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여 둔다. 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나, 옛 가야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천황이 이 달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 전투가 단순하게 여기서 싸운 게 아니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도록 만드는 그 중간단계였습니다. 그 다음에 가야가 무너져버리고 그 뒤에는 백제까지 같이 멸망하니까 일본으로써는 충격이었던 겁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에서 아주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보시면 뭔가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백제 성왕은 살아있을 때 수도를 옮깁니다. 성왕이 공주에 있던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꿉니다. 遷都(천도)를 잘못하면 큰일 난다는 게 백제의 경우입니다. 백제는 천도를 세 번 했죠. 처음의 수도는 위례성입니다. 지금 강동구 천호동 근방에 있던 위례성이었는데 고구려가 쳐들어오니까 공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공주가 좁잖아요? 그래서 다시 부여로 옮겼는데 이렇게 수도를 옮길 때마다 亂이 일어나거나 쿠데타가 나든지 해가지고 정권운영이 잘 안됐습니다.
반면 신라는 경주에 터를 잡은 다음에 망할 때까지 한 번도 옮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하면 지금의 서울과 경주를 말합니다. 서울의 어원이 서라벌입니다. 서라벌이 변해서 서울이 된 겁니다.
아무튼 백제는 성왕이 죽은 뒤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기회를 잡은 게 의자왕 때입니다. 의자왕은 초창기에는 상당히 영명한 왕이었습니다. 의자왕의 백제는 계속 신라를 쳐서 합천-당시는 대야성이라고 했는데-을 함락시킵니다. 그때가 642년인데 합천을 함락시킬 때 성을 지키던 김춘추의 사위와 며느리가 항복을 해요. 항복한 이후에는 여기와 비슷하죠. 의자왕은 항복한 사람들을 모두 목을 쳐 죽여버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의 반응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잘 나와있어요.
김춘추가 그날 사위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둥에 머리를 박고 멀뚱멀뚱하게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게 있으면서 하루동안 가만히 있더라는 거에요. 그러더니 반드시 내가 이 복수를 해야 되겠다 하면서 삼국통일의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삼국통일이라는 것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겠다는 계획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 후에 김춘추는 일본에 건너갑니다. 일본과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잘 안됩니다. 그 다음에 고구려를 찾아가 연개소문을 만납니다. 김춘추를 만난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에 있는 땅, 신라 진흥왕 때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땅을 다 돌려주면 니네 편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와도 연합이 안됩니다. 결국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를 찾아가서 당태종과 만납니다. 거기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이 만들어집니다. 이 연합을 통해서 당나라는 신라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려고 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거죠.
그때 국제사회에서는 백제, 고구려, 倭가 한 편이 된 남북 동맹이 있었고 당나라 신라가 연합한 동서 동맹이 있었습니다. 나당 연합군과 고구려, 백제, 倭가 전쟁을 벌인 결과, 나당이 이겼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망하고 倭는 중립화돼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200~300년 동안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여기 문화원 부원장 전순표 선생님이십니다. 일부러 또 오셨네요.

전순표 옥천문화원 부원장: 저희 옥천을 방문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희 옥천은 삼국시대 산성 유적이 사십여 군데나 됩니다. 이 곳 구진벼루를 빙 둘러서 모두 산성터입니다. 조 기자님께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만 여기가 삼국시대의 격전지였습니다. 관산성이죠. 또 삼국의 구분을 가로지르는 그런 사적지가 여기 있다고 합니다만 저희가 몇 년간 찾으려고 해도 못찾고 있습니다.
관산성 전투 당시 백제의 군사가 이곳 접경지역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여기 10리 내에는 전부 백제 땅이었습니다. 백제 군사가 여기 있었고 백제 성왕은 저쪽에 고리산이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오셔가지고 성왕의 아들 여창, 나중에 위덕왕이 되신 여창이 여기 넘어가 탄현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왕은 아들이 최전선에 나가서 고생을 하고 있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니까 격려차 이곳으로 왔어요. 성왕은 친위대 기마병 50여 명을 데리고 저쪽으로 갔습니다. 마침 보은 삼년산성에는 신라군 사단급 규모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주둔하던 진천은 군사령부, 여기는 사단급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신라군이 여기 와서 매복을 하고 백제 성왕의 움직임을 봤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마 여기서 붙잡아서 이쪽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백제 성왕을 처단을 해서 경주로 목을 보냈습니다. 북청 계단이라고 해서 왕궁에 가면 계단이 있잖아요. 계단 아래에 놔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그랬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저희 옥천을 관산군이라고 했었고 그 다음에 북한산성에 성을 지키는 사람을 관성장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관성군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조선 태종 시대부터 옥천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600여년간 이르고 있습니다.
옥천에는 백촌 김문기 선생, 그리고 조원 선생이 원래는 김포 분입니다만 이 곳에서 활약하신 분입니다. 그 분께서는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견하셨습니다. 보은 현감도 하셨어요. 그 외에 전라도 道使(도사)도 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전기를 잘 보세요. 조원 선생은 토정 선생에게 배운 역술로 앞으로 전쟁이 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李珥(이이)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이야기했을 때 ‘아, 우리도 군사를 많이 비축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상소를 경복궁 앞에 도끼를 들고 가서 ‘왕께서는 군사를 많이 기르십시오’하고 몇 년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상소하면서 귀양도 가고 그랬던 분입니다.
그 분께서 보은 현감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내놓고서 옥천 안내면으로 오셔가지고 그곳에 후율정사라는 정사를 지어서 후학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이 선생이 율곡이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후율이다. 율곡 선생의 제자라고 자처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열흘만에 상주를 점령했어요. 그러니까 경상中路, 경상西路, 경상東路를 따라서 상주까지 왔어요. 상주에는 서울에서 보낸 군사와 자체적인 군사들이 있었지만 점령당했습니다. 일본이 침공한 지 열흘 만에 상주가 점령당하고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서울이 점령당했죠. 그당시 올라가는 적군에 대항해서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인 조원 선생께서 이 옥천에서 제자들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서 보은에서 청주로 가는 차림이란 곳에서 전투를 벌여 처음 승리를 했습니다. 그 후 금산 전투에서도 승리를 했던 그런 고장입니다.
다른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조선왕조실록에 함자가 삼천 번 나오는 분이 송시열 선생입니다. 송시열 선생이 옥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는 그 가문이 대전 회덕에 있었지만 우암 선생께서 이 옥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나셨죠. 정지용 축제가 올해로 열일곱 돌이 됐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육영수 여사가 이 옥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침 오늘이 육영수 여사 생가 상량식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제가 늦었습니다.

조갑제: 육영수 여사 生家(생가)는 이제 다 지었습니까.

전순표: 안채를 열두 채 짓는데 오늘 나무로 상량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 5월이나 6월 중에 안채 준공식을 하고 2007년까지 70억을 들여서 한 3년 뒤에 완성할 예정입니다. 郡費(군비) 4억, 충북도비 4억, 국비 4억 이렇게 12억을 들여서 우선 안채부터 짓고 앞으로 3년간 50억 원을 더 들여서 완성할 계획입니다.

조갑제: 그럼 堂號(당호)는 뭐라고 합니까.

전순표: 육영수 여사 생가라고 합니다.

조갑제: 그럼 육 여사 생가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보다 먼저 서는 거네요.

전순표: 그렇네요. 그리고 여기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모두 복숭아 묘목들입니다. 1970년대, 80년대부터 옥천은 복숭아 묘목으로 유명합니다. 옥천은 묘목의 고장입니다. 전국 묘목의 60%를 공급합니다. 복숭아, 포도, 사과, 밤, 대추 묘목의 60%를 옥천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 비닐하우스 포도도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포도연구소가 전국 유일하게 옥천에 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조갑제: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8. 베일에 쌓인 경주 고분群

"지금 경주에서 보이는 왕릉은 155개에 달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것인가 정확하게 알려진 건 28개에 불과합니다"

편집자注: 8편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에서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왕릉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분량이 길어 상, 하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반갑습니다. 저는 경주의 향토 사학자 이재호입니다. 상미회와의 인연이 지난 번에도 있었습니다. 여기 지명이 경북 경주시 서악동입니다. 이곳이 서악동 고분群입니다. 여기가 태종무열왕릉입니다. 저기 써놓은 걸 보고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 왕릉이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돌로 만든 거북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동감이 있는 돌거북이 보셨습니까. 실제 거북이보다 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특히 목을 보십시오. 방금 목을 쑥 뺀 거 같지 않습니까. 발톱도 한 번 보십시오. 이런 형식으로 조각하는 것은 신라 때 당나라에서 도입된 것인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산소를 쓰면서 거북이를 만들 때 이 형식으로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재벌들이 산소를 쓸 때 거북이 만드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거북이像은 발에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형물에 힘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사람들은 단가로만 생각하죠. 돌값 얼마, 石手(석수) 임금 얼마 등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단가대로만 하기 때문에 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북이像에 생동감이 없는 거죠. 옛날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정신과 혼을 담았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이런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거북이를 만들 때 선조들이 어떻게 새길까 제일 고민했던 것이 꼬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유적을 보면 거북이 꼬리가 위로 올라간 것도 있고 밑으로 내려간 것도 있고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이 거북이가 살 것인가, 저는 이 보이지 않는 것, 어떻게 보면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서 조형물의 생동감이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 위에 보면 이걸 龍首(용수)라고 안하고 螭首(이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용이 되기 전 이무기일 때 螭(교룡 이)를 써서 螭首라고 하죠. 그러니까 용되기 직전, 용이 되면 승천해버리니까 용을 쓰지 않고 이자를 사용합니다. 조갑제 선생님?

조갑제: 네. 저는 경주에 오면 여기가 제일 좋아요. 여기서 올려다보면 꼭 이발소 그림 같지 않습니까. 좌청룡 우백호도 균형이 딱 맞습니다. 이 위로 고분이 다섯 개가 있는데 느낌이 꼭 항공모함같아요. 저는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이 곳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명당중 하나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역사에서 제일 인물 중 하나니까요. 태종무열왕의 외교력, 목숨을 건 외교력이 삼국통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분이 신라에서 살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인이었습니다. 642년 자신의 사위와 딸이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죽고 난 다음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후 먼저 일본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일본으로 갔다고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그 책에 굉장히 말을 잘하고 잘 생겼다고 나옵니다. 원래 일본서기라는 책은 신라를 비난하기 위해서 쓴 책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돌아와서 647년에는 고구려와 동맹을 하기 위해서 연개소문과 만납니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신라와 동맹을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건 안된다고 하니까 붙잡힙니다. 태종무열왕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유신 장군이 결사대를 조직해 쳐들어간다고 하자 풀어줍니다.
그 1년 뒤에 이번에는 당 태종을 찾아 당나라 서안으로 갑니다. 거기서 羅唐(나당) 동맹을 맺습니다. 당은 신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치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어 백제를 치기로 합의합니다. 그때도 태종무열왕이 身言書判(신언서판)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태종도 당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알아본다고 당 태종은 태종무열왕의 인물됨을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 후 당나라에서 돌아오다가 서해안에서 고구려 경비정에 걸렸습니다. 잘못하면 죽을 판인데 부하가 태종무열왕의 옷을 입고 대신 죽습니다. 그런 우여곡절끝에 660년 당나라에서 13만 군대가 오고 여기에 김유신 장군의 5만 군대가 합세해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한 다음해인 661년에 돌아가십니다. 상당히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태종무열왕보다 김유신 장군이 여덟 살이 많습니다. 태종무열왕의 어머니가 진평왕의 딸이고 김유신 장군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여동생입니다. 나중에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부인이 되는 건 잘 아실 겁니다. 복잡한 혼인관계로 양 집안이 묶여가지고 삼국을 통일합니다. 삼국을 통일하려면 먼저 권력이 확고해야 됩니다. 권력이 분열되면 안됩니다. 신라부터 권력을 확실하게 잡아야죠. 이렇게 김유신 장군이 뒷받침하고 태종무열왕이 왕이 되고 그 다음에 문무왕, 이 세 분을 신라통일의 三勳(삼훈)이라고 합니다. 태종무열왕은 외교와 왕권, 김유신 장군은 병권과 전략을 담당했습니다. 통일은 문무왕 때 결국 해냈습니다.
문무왕의 遺書(유서)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만 문무왕은 사람이 아주 담백했던 것 같습니다. 담백하고 결단력이 있고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문무왕에 대해 알수록 점점 좋아지더라구요.
이 문무왕의 제일 중요한 결단은 당나라와의 싸움입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 싸워 한반도를 지켜낼 결심을 한 사람입니다. 문무왕이 마지막에 6년을 싸워 당나라를 쫓아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을 쓰면서 한민족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문무왕도 50대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것만 생각하는데 당나라를 쫓아낸 그 위대함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재호(향토사학자): 조갑제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을 다 하셔가지고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저는 참고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르신들께 존대만 하면 공부가 제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편의상 제 이야기를 들으실 동안만 학생으로 대우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로 가실 때는 환원시켜 드리겠습니다. 학생 때가 제일 좋은 거 아시죠.
조금 전에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김춘추를 요즘으로 따진다면 아마 미국의 CIA 국장 정도라고 봅니다. 외교와 국제관계에서 완벽하게 행동했습니다. 신라 당시의 당나라는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국제적인 국가였습니다. 그때 비단길이라든지 다 개척했으니까요.
그런 당나라와 대결한 신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첨단인 나라와 외교 전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미국과 외교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러니까 김춘추가 美CIA 국장 정도의 국제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고구려, 당나라와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국제정세를 한눈에 읽었다는 겁니다. 일단 이 곳을 둘러보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왼쪽으로 돌도록 하겠습니다. 왼쪽은 연장자, 높은 지위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서원에 들어가면 東齋(동재), 西齋(서재)가 있는데 동재는 나이 많은 학생들을 가리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즘은 학생들 사이에 나이 차이가 안나는데 과거에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이 많는 서원의 학생들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할 때도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더 높습니다. 영의정이 국무총리라면 좌의정, 우의정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깁니다.
원래 정상적으로 돌아보시려면 저기 보이는 산까지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야기만 해드립니다.
저기에 서악동 고분이 있습니다. 황룡사에서 보이겠지만 경주에서 황룡사를 중심으로 잡았을 때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남산은 남쪽, 이곳은 서쪽, 동쪽은 토함산과 불국사입니다. 북쪽은 틔여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곳의 小금강산을 北岳으로 봅니다. 거기서 확대하면 계룡산, 태백산, 지리산 등을 봤습니다. 중앙은 팔공산으로 봤습니다. 신라는 이런 식으로 몇 겹으로 동서남북의 위치를 잡아 발전해 나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하고 학생들하고 인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몇 년에 어땠니 하는, 그렇게 책에 있는 것은 생략합니다. 저는 이런 유물을 어떻게 보는가 방법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역사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 합니다.
역사유물을 보면서 느끼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많이 알아서 느끼는 방법이 첫 번째입니다만 세상 모든 것을 언제 다 알겠습니까. 몰라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인, 유물에 대해서 몰라도 느낄 수 있는 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평지에서 하나의 왕릉을 보느냐 아니면 측면에서 겹으로 보느냐, 건물을 바라보면서 이 왕릉들을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집니다. 이런 아름다움도 계속 봐야지 자기 것이 되지 안보다가 보면 좋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美的(미적)으로 보는 방법도 계속 익혀야 합니다. 저는 그런 쪽으로 감각을 실어드리려 합니다.

조갑제: 이게 왕릉은 확실한가요.

이재호: 기왕에 왕릉에 왔으니까 설명드리겠습니다. 신라는 56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지금 경주에 보이는 능은 엄청 많습니다. 크기로 봐서 왕릉에 준하는 것들을 일제 시대에 고유번호를 매겼던 적이 있는데 역대 왕의 세 배 정도입니다. 155개나 됩니다. 그 번호의 마지막이 우리가 들어봤던 천마총입니다. 천마총도 원래 이름은 墳(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덤들을 발굴하기 전에는 분이라고 합니다.
발굴해보니까 왕릉은 왕릉인데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천마도가 있어 천마총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왕릉은 왕릉인데 누구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을 때는 총을 붙입니다. 발굴하지 않은 것은 총을 붙이지 않습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陵(릉), 왕세자의 무덤은 園(원)이라고 붙입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왕으로 재임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墓(묘)가 됩니다. 크기는 왕릉보다 큽니다만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묘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도 묘가 되는 거죠.
아무튼 그 크기에 따라 왕릉에 준한다 하는 것이 155개라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왕릉인가 아닌가는 1730년을 기준으로 엄청나게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당시는 조상숭배가 엄청 강했을 때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라 왕릉 11기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삼국사기에 따른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지금같이 어디서 몇 미터와 같이 정확하게 위치를 표현한 게 아니라 어떤 절이 있다고 하면 어느 절 남쪽 방향 이런 식으로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진 것이 11기입니다. 이것이 1730년부터 바뀝니다.
당시 경주군수였던 김시행이라는 사람이 박씨 문중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우리 왕릉을 한 번 정비해보자’ ‘그래, 그럼 박혁거세의 무덤이 저 부근이니까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쪽 부근은 박씨일 거다’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게 됩니다.
저기 보시면 남산 서쪽편입니다. 저기에 있는 왕릉은 전부 다 박씨입니다. 봅시다. 三陵(삼릉)에 가면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그곳에 있는 왕릉은 전부 박씨입니다. 그리고 동쪽에는 김씨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1730년 17개가 추가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28개입니다.
앞으로 신라 왕릉에 대해 연구할 것이 많습니다. 문제는 발굴하는 겁니다. 천마총의 경우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다보니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발굴하려면 문중에서 데모하고 난리가 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원래 묘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많은 반대를 걱정해서 주인이 알려지지 않은 릉 중에서 크기가 조금 작은 것을 일종의 연습으로 발굴했는데 바로 천마총입니다. 그걸 발굴하니까 유물이 엄청 나왔었죠.
일단 왕릉은 발굴을 안해봤기 때문에 뭐가 어떤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에 누구누구의 왕릉이라고 써놓지를 않았습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무녕왕릉에는 삼화왕이라고 써놨으니까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아무 것도 안써놨습니다. 누구의 무덤인가에 대해 써놓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유추해보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는 웬만하면 자신의 조상 묘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당시 신라 사람들도 조상 묘를 가족들이 다 알고 있는데 굳이 표시할 필요가 있나하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다 신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했던 거 같구요.
일단 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9. "원래 감춰진 것이 오묘한 겁니다"

"문화 유적들을 보실 때 앞만 보지 마시고 뒤를 돌아보시면 기막힌 모습들이 많습니다."

편집자注: 9편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에서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왕릉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2월 24일에 이은 하편이다.

조갑제: 이재호 선생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경주 고분이 언제부터 나타났느냐 하면 4세기부터 나타나는데 그때가 신라가 박씨, 석씨 다음에 김씨 왕조가 나타난 시대입니다. 미추왕 다음에 내물왕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예전에 98호분-다른 이름이 대릉원입니다-을 우리가 발굴한 적이 있습니다. 98호분은 천마총 맞은편에 있습니다. 천마총은 1973년에 발굴했고 98호분은 이어서 1974년에 발굴했습니다. 그것을 내물왕릉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학자들 중에 많아요. 그리고 155호분은 법흥왕의 아버지인 지증왕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가 6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고분들의 형식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도 잘 안바꾸는 게 장례풍습입니다. 그러니까 장례풍습을 보면 무덤의 주인이 어떤 계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장례풍습중 적석목곽분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어떤가 하면 나무로 관을 짜서 시신을 넣고 그 위에 자갈을 얹고 마지막에 흙을 덮는 형식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 관이 무너지면서 그 위에 쌓은 자갈돌에 무덤이 눌려버립니다. 도굴을 안당하겠죠. 경주 고분에서 신라 유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무덤 형식 때문에 도굴이 안되서 그렇습니다. 덕분에 이 무덤들을 발굴하면 금관도 나오고 합니다.
이런 무덤 형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스키타이라고 하는, 이란 계통의 유목민족, 흉노족 그쪽에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고분들이 왜 4세기부터 나왔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무렵에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민족 일단이 들어와 여기의 토착 왕조를 누르고 김씨 왕조를 세운 게 아닌가 하는 게 저의 가설이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아마 이 무덤은 적석목곽분이 아닐 겁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없어집니다. 중국의 영향을 바로 받기 시작하는 게 법흥왕 때로 추정됩니다. 법흥왕이 신라를 개혁하죠.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법흥왕이 불교과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가지고 일종의 유신을 합니다. 그때부터 신라가 강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적석목곽분같은 유목민족 계통의 무덤이 사라지고 석실묘가 생기는 시기입니다. 석실묘는 100% 도굴됩니다. 뚫기 편하지 않습니까.

이재호(향토사학자): 제가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묘 형식이 이렇게 둥글지 않습니까. 이게 원형봉두분이라는 겁니다. 신라 시대의 묘 중에서 석실분 이전의 적석목곽분들은 현재 함몰된 게 많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목곽을 넣은 다음 머리만한 돌들을 쌓은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건 목곽이 썩으면 돌이 눌러 함몰됐다는 설도 있고 경주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은 청춘남녀들이 그 위에서 사랑을 나누다 함몰돼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제 위로 한 번 올라가 보시죠.
아까 저기서는 세 개밖에 안보였는데 지금은 숨어있던 것들이 보입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원래 감춰진 것이 오묘한 겁니다. 보이는 건 별 게 아닙니다.
옛날에는 여행가면 속리산 법주사에 다녀왔으면 됐고 경주 불국사에 다녀왔으면 됐지 뭐가 필요하냐 했습니다만 지금은 불국사에 갔다오면 내가 뭘 봤고 뭘 느꼈다고 하는 게 필요합니다. 불국사도 앞만 보면서 구경하면 별다른 게 없습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기가 막힌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인생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앞만 보다 한 번쯤은 뒤를 한 번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펼쳐집니다. 이런 유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뒤를 돌아보면 유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때로는 뒤를 돌아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와 인연을 맺은 학생들만이라도 앞만 볼 것이 아니라 좀 더 폭넓게 뒤도 앞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입구 맨 앞쪽의 것이 태종무열왕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것들은 뭔가. 여러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틀린데 김씨의 것이 위에 것이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우리가 조상을 숭배하던 풍습을 기초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신라 시대에도 과연 그랬을까 생각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조선시대나 지금처럼 할아버지 묘 밑에 아버지 묘를 쓰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태종무열왕릉 위의 능은 그 윗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그건 우리시대의 생각일 뿐이고 신라 시대는 근친혼에서부터 해서 가족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릅니다. 姓도 지금과 다르고 자식이 여자의 姓을 따르는 등 지금과는 가족제도가 달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드리겠습니다.

조갑제: 현재 경주 사람들은 어떤 산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합니까.

이재호: 경주는 산업 조건이 별로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합니다. 경주에는 공장도 없고 큰 관공서도 없습니다. 경주 인구가 13만 명입니다. 서울의 작은 규모의 洞만 합니다. 그런 작은 곳에서 어떤 산업이 있어 잘 살겠습니까. 살기가 어렵죠. 최근에 방폐장 건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경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좀 안맞습니다. 제가 며칠 전 서울 CBS에서 생방송을 하고 왔는데 방폐장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방폐장은 경주와는 이미지가 안맞기 때문에 방폐장이 들어선다는 행정구역이 양남이라는 지역이니까 양남 방폐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로마 방폐장, 아테네 방폐장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가 그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이라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태종무열왕릉은 다 보셨습니다. 다음 코스로 가시죠.



10. 삼국통일의 외교 幕後, 김인문碑

"김인문은 요새로 비교하면 駐美대사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편집자注: 10편은 태종무열왕릉 맞은 편에 있는 김인문의 묘비에서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보통 삼국통일의 주역을 김유신, 태종무열왕, 문무왕, 이 세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 이 분을 포함해 삼국통일의 주역 4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 비는 김인문을 기리기 위한 비입니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왕릉이라는 서신을 보면 명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당나라에서 22년 동안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나라와 신라가 친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신라가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당나라 황실에 김인문을 파견한 겁니다. 일종의 인질외교를 한 겁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하려면 작은 나라인 신라가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연합을 해야만 했습니다.
김인문은 어디까지나 신라 사람이니까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아 거기서 좋은 정보가 있으면 신라에 알려주는 등의 활동을 통해서 신라통일에서, 특히 외교 분야에서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요새로 말하자면 일종의 대사로 활동했습니다. 주미대사 정도의 수준이었죠.
이 사람이 곤란한 처지에 빠진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 당나라는 사실상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라가 못참으면서 670년부터 676년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말하는 대당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싸울 때 작은 나라가 일방적으로 큰 나라를 이겨도 곤란합니다. 이때 문무왕이 어떻게 했냐하면 한 번 당나라와 싸워 이기고 나서는 당 고종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이고, 미안하게 됐다’고. 그러면서 잡은 포로들을 다 돌려보내줍니다. 그러면서 또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는 이런 和戰(화전)양면의 전술을 썼습니다. 당나라도 계속 공격을 당하다 보니까 신라가 당나라까지 쳐들어올 나라는 아닌 것 같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신라와 끝까지 싸워봤자 별 이득도 없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667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만주로 이동시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김인문이 곤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당나라가 가만보니까 문무왕이 괘씸한거에요.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문무왕이 독립국가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당나라는 문무왕을 계림 대도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당나라의 한 지방영주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삼국통일 이후에 당나라와 신라가 싸우게 된 제일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당나라가 신라를 지방 영주로 취급하자 신라가 ‘우리는 그런 대접 못받겠다’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가 문무왕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썼습니다. 문무왕을 폐하고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임명해버린 겁니다. 그러면서 김인문에게 ‘당신이 귀국할 때 우리 당나라 군대가 호위를 할테니까 가서 형을 밀어내고 왕을 하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준비를 마치고 신라로 오는 중에 문무왕이 편지를 잘 써서 김인문도 오지 않고 충돌도 안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김인문이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절대 권력욕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보통 권력에 맛이 들면 헤어나질 못합니다. 말하자면 당나라 앞잡이가 돼서 문무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다가 죽든지 그렇게 됐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김인문은 결국 당나라에서 죽었습니다. 이 비문에 써 있는 太大角干(태대각간)이라는 직위는 당시 신라에서 제일 높은 직위입니다. 김유신도 태대각간이었죠. 干(간)이라는 것은 징기스칸의 호칭에서 붙은 칸, 그 단어입니다. 신라 관직 이름에 보면 각간이라는 표현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는 王(왕)이라는 단어를 안썼습니다. 지증왕 이후에야 왕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 전에는 麻立干(마립간)이라든지 하는 여러 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몽고에서 쓰였던 칸과 같은 의미의 干, 그것이 바로 신라사람들이 어느 계통인지를 잘 보여주는 겁니다. 칸(干)이라는 말은 크다는 말입니다. 대한민국할 때 이 한자의 韓(한)도 칸이라는 말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을 영어로 번역하면 ‘그레이트 칸 리퍼블릭(Great Khan Repblic)’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이재호 선생이 설명하겠습니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좀 전에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 지금 이 안내판이 잘못된 거 같습니다. 저는 원래 이런 안내판을 잘 안보는데 이 안내문이 잘못돼 있는 거 같습니다. 김인문은 당나라에서 죽은 게 맞아요.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들리겠지만 경주에서 개인을 위해서 지어준 절이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김인문을 위해 지은 절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삼국통일 당시 김인문은 對唐(대당) 외교의 첨병이었죠. 당시 자기 형인 문무왕이 권력과 모든 것을 다 쥐고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대당 외교에서 큰 공을 세운 동생을 위해서 절을 지어줍니다. 이 절을 지어주는데 오다가 죽어버립니다.
아무튼 이 안내판이 잘못돼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인문은 배를 타고 귀국하다 죽는데 그 때문에 이 절은 아미타 신앙을 모시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극락왕생을 비는 절이 되는 겁니다.
저기 보면 인용사터가 있습니다. 김인문을 위해서 지어준 절이 인용사입니다. 극락왕생을 빌며 아미타불을 모신 절입니다. 우리가 점심먹는 데서 멀지 않으니까 시간이 되면 가보겠습니다.
지금 이건 김인문을 위해서 지은 비입니다. 여기 비문과 돌거북이를 보실 때 아까 봤던 태종무열왕릉 것하고 비교해서 감상해보세요. 원래 이런 유물을 비교해서 볼 때 유물에 대해서 잘 모를때 안좋은 것만 자꾸 보면 그게 좋은지 나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좋은 것과 안좋은 것을 같이 보면 두 개의 유물이 전혀 달라보입니다. 아까 우리가 봤던 것하고 이것하고 비교하면 이것도 그런대로 잘만든 것인데도 아까 것에 비해서는 조금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것도 분명이 좋은 작품입니다. 만약 아까 그 잘난 것을 안보고 이것만 봤다면 이게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됐을 겁니다. 이제 김유신 장군묘로 가시죠.



11. 가장 약한 나라가 이뤄낸 삼국통일

신라는 불리한 환경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신라의 역동성이라고 봅니다.

편집자注: 11편은 김유신 장군묘에서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분량이 길어 上下로 나눠 게재한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여기가 김유신 장군묘입니다. 이 잔디가 파랗게 물들었을 때 여기서 보면 경치가 기가 막힙니다. 이런 유물을 보는 방법에 대해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유물을 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밑에서 위로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걸 仰視(앙시)라고 합니다. 배가 조선소에서 처음에 나올때 그걸 보는 걸 仰舟(앙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물을 위로 올려다보면 일종의 설레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스코리아를 심사할 때도 보면 항상 밑에서 올려다보면서 심사를 하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심사를 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과거 히틀러도 이런 방법을 이용했다고 그럽니다. 제가 듣기로 히틀러는 연설을 할때 달밤에는 안하고 꼭 캄캄한 그믐날 밤에 고가 사다리를 타고 자기 혼자 올라가서 조명을 받으면서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한 상황에서 ‘독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그러면 군중들은 ‘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반대로 히틀러가 관중을 내려다보는 식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기법입니다. 이걸 俯瞰法(부감법)이라고도 하는데 일명 헬리콥터 기법입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시각입니다. 석탑과 같은 유물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좋습니다. 최근 각종 공연을 할 때가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관객이 밑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우러러보는 형식이었는데 이제는 층계 위로 올라가서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면서 공연을 잘 하고 있는가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죠.
참고로 서양에서는 험한 산세와 지형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 지어야 하다보니 건축이 발전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산세와 지형이 좋아서 그냥 집하나 슬쩍 지어도 괜찮으니까 건축이 제대로 발전을 안한 편입니다. 그냥 대충 지어도 자연과 잘 어울리니까요.
서양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당같은 게 그렇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聖소피아 성당에 들어가면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입니다. 그 천장의 높이나 규모 등에서 위압감에 눌려 ‘아이고, 회개하겠습니다. 하나님!’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그 다음에 평지에서 보는 게 평원법입니다. 이건 보통 유물을 감상하는 방법입니다.
이상 위에서 보는 법, 위로 보는 법, 평원법을 잘 사용하신다면 어떤 유물이든지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제가 김유신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김유신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유신은 일단 출신이 안좋았습니다. 그는 가야의 왕족 출신입니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증손자인가 그렇게 될 겁니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아는 金舒玄(김서현)입니다. 김서현은 김유신의 생가가 있는 충북 진천의 군수였습니다. 거기 군수로 발령되기 전까지 김유신 일가는 가야의 망한 왕족이기는 했지만 신라의 귀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골, 진골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김서현은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萬明(만명) 부인과 서로 눈이 맞습니다. 보통 중매결혼은 조건을 봅니다. 그렇죠? 서로 집안과 돈, 잘난 거 못난 거를 보지만 연애는 다릅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면 결혼하는 게 가능하죠. 그렇게 김서현과 만명 부인이 서로 좋아하게 됐을때 만명 부인의 가족들이 말립니다. 그때 만명 부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 미쳤냐, 그런 놈하고 니가 친하면 되겠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신이 안맞았기 때문입니다. 만명 부인의 아버지는 결국 만명 부인을 창고에 가둬버렸습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때 벼락이 쳐서 창고가 무너지는 바람에 만명 부인이 도망쳐 나왔다는 게 있고 다른 하나는 그 때부터 김서현이 만명 부인을 업고 진천까지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거기서 낳은 아들이 바로 김유신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의 고향이 진천이 되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그럴 수 있는 상황입니다만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김유신이 만명 부인의 속을 썩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만명 부인도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을 했다는 것에 대해 자기 친정에 어떤 미안함이 있었을 겁니다. 그 엄마도 ‘니가 그렇게 결혼해서 잘 사는가 보자’ 이렇게 말했을 거라는 겁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반대하는데도 서로 사랑한다면서 결혼하면 니가 나중에 잘 사는가 보자 이러지 않습니까. 이랬기때문에 만명 부인은 자기 친정에 안갔습니다. 대신 김유신을 잘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키운 김유신이 커가면서 보니까 애가 잘난 겁니다. 잘 키웠다고 자부하는데 이 애가 자기 아버지하고는 전혀 다르게 자기보다 신분이 못한 여자하고 친하게 지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天官女(천관녀)입니다. 김유신이 천관녀하고 친하다는 걸 알게된 만명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김유신에게 이야기합니다. 만명부인이 ‘니가 계속 그 여자를 만날꺼냐’고 물으니까 김유신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김유신이 술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술을 먹고는 말에 실려 다시 천관녀의 집에 가게 됩니다. 이야기의 다른 주인공인 그 말도 名馬(명마)였습니다. 그 말을 탔는데 이거 아닙니까. 사람은 보통 술을 마시면 감성적으로 변합니다. 이성적으로는 어머니가 천관녀를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해서 그걸 참고 있는데 술을 마시니까 또 천관녀 생각이 막 나는 겁니다. 그래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내키는대로 행동하기는 미안한 거죠.
제가 혼자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갈등하던 김유신도 술에 취하자 ‘아이고, 모르겠다’하고는 말 등에 가만히 누워있었겠죠. 그러니까 말이 알아서 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면 그 말이 명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인이 술취하면 어디로 간다는 그 습관대로 간 겁니다.
김유신은 그 상태에서 그렇다고 자기가 말꼬리를 잡고 ‘야, 안돼’하기에는 좀 감성적으로는 이미 안맞는 거에요. 천관녀에게 끌리기는 끌리고 어머니는 반대하고 이러니까 그 묘한 갈등 상황에다 술까지 먹으니 ‘에이 모르겠다’하고 간 겁니다. 그렇게 천관녀를 찾아가서 원앙금침 깔아놓고 술 먹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일어나보니까 자기집이 아닌 겁니다. 이제 현실로 돌아오니까 ‘아이쿠, 큰일났다’ 싶어서 결국 말의 목을 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간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때 뒤도 안돌아보고 갔다고 이야기하는데 원래 큰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옛날에 사명대사가 있던 절에 왜군이 불을 지르려 했습니다. 사명대사가 ‘나는 절대 안돌아본다’ 그러니까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카가 그럽니다. ‘저 중이 뒤를 돌아보면 목을 쳐라’ 했는데 뒤를 안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절에 지른 불을 끄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큰 사람들은 뒤를 안돌아봅니다.
그렇게 김유신이 뒤도 안돌아보고 가니까 천관녀로써는 ‘저게 날 좋아할 때는 언제고’ 하면서 엄청나게 고통을 받습니다. 여기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천관녀가 ‘아, 저 사람은 큰 사람이 돼야 된다. 그러면 난 저 사람이 잘되도록 평생 기도해줘야겠다’고 해서 중이 됐다는 설과 김유신이 떠난 다음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김유신은 통일도 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 다음에 과거를 회상하다 천관녀를 생각해냈습니다. ‘아, 내 옛날 애인.’ 그래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수소문을 해보니까 천관녀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집터에다가 천관녀를 위해 절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그것이 天官寺(천관사)입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대하던 만명 부인이 지내던 김유신의 집터 자리인 財買井(재매정)이 있습니다. 김유신 묘와 재매정과 천관사 터, 이 세 군데가 묘하게 삼각축으로 돼 있습니다. 김유신이 천관녀를 보려면 어머니가 항상 걸리는 겁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머니 묘를 통해야지만 천관사가 보입니다. 만명 부인이 죽어서도 아마 ‘너는 잘난 거하고 서로 좋아해야돼’ 그런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김유신하고 김춘추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만 이야기하고 조갑제 선생님께 이야기를 넘기겠습니다. 당시 김유신도 일단 자기 신분이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세를 해야 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생각하게 된 게 김춘추하고 처남매부지간을 만드는 거 였습니다.
김유신에게는 여동생인 寶姬(보희)와 文姬(문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큰 여동생인 보희가 어느날 꿈을 꿨는데 선도산에서 소변을 누니까 온 서라벌 장안이 소변 바다가 되는 겁니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문희가 언니에게 비단 저고리를 주고 꿈을 삽니다.
김유신은 김춘추보다 9살이 많습니다. 하지만 김춘추는 출신이 좋았습니다. 왕족이었습니다. 잘 하면 왕이 될수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김유신으로서는 김춘추에게 잘 보이는 것도 별로 안나쁘죠.
이렇게 김춘추와 친해질 기회를 보던 김유신이 축국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았습니다. 이때 김유신이 나이는 많아도 신분 차이가 나니까 사과를 하고 자신의 동생방으로 김춘추를 데려 갑니다. 계획적이었죠.
일단 스타가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합니다. 얼굴만 잘나서는 안되죠. 우선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돈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얼굴이 이뻐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선덕여왕, 클레오파트라 전부 그렇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권력만 가지고도 안되고 얼굴만 가지고도 안되고 모두 돼야 하죠.
어쨌든 문희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기워주다가 서로 눈이 맞아가지고 나중에 둘이 부부가 됩니다. 이를 계기로 김유신과 김춘추의 합작이 시작되는 거죠.
아까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김춘추의 사위 品釋(품석)하고 자기 딸이 지금의 합천에 있던 대야성에서 싸우다 죽었습니다. 게다가 백제에서 시체까지 가져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김춘추가 완전히 미쳐버린 겁니다. 그때부터 이걸 복수하기 위해서 외교가 시작됐습니다. 즉 신라의 힘이 약하니까 강한 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해 노력한 겁니다.
그렇게 고구려에 갔는데 고구려에서는 땅을 달라하니까 내가 권한이 없다고 했다가 갖혀버리죠. 이때 김춘추가 꾀를 씁니다. 내가 땅을 주겠다고 고구려와 거짓 약속을 합니다. 김유신과는 그 전에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60일 이내 돌아오지 않으면 니가 데리러 와라.’ 둘이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김유신이 김춘추를 데리러 옵니다.
그렇게 돌아온 다음에 김춘추가 이러죠. 내가 고구려에 한 말은 거짓말이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좌우간에 둘은 나중에 환상의 콤비가 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삼국통일같은 대업을 이룰 때는 왕만 잘나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한가지만 제가 추가를 할께요. 삼국 중에서 가장 약한 신라가 어떻게 통일을 했는가가 의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신라의 힘이 강했다면 통일이 안됐을 겁니다. 당시 삼국 중에서 신라가 가장 강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가장 사상적이고 철학적이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라에는 당나라 유학생이 가장 많았습니다. 조건이 불리한데도 말이죠.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 똑같은 조건에 책만 보면 될 때는 우리가 시골에서 태어나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판검사되고 그랬죠. 지금은 부모의 조건이 중요하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시골 출신들이 공부만 하면 성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라도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삼국 중에서 당나라 유학을 제일 많이 갔습니다. 그렇게 선진문물을 배웠고 정신적으로 발전하면서 화랑도 정신적으로 무장이 됐습니다. 화랑들은 바로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첨병들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신라가 통일하는데 힘이 됐습니다.
낙동강, 이것도 신라의 힘이 약할 때는 천연의 방어선이 됐습니다. 태백산맥도 그 산줄기를 보면 고구려 세력들이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신라는 힘만 있으면 넘어가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신라는 불리한 환경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 장단점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장점도 단점이 될 수 있고 단점도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는 단점이었던 것을 장점으로 활용한 것이죠. 그게 바로 신라의 역동성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정도로 하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 삼국통일 삼총사의 콤비네이션

한 신라史 연구학자에게 왜 고구려가 신라에 망했냐 물으니 ‘태종무열왕과 연개소문의 인간성을 비교해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편집자注: 12편은 김유신 장군묘에서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의 下편이다.

조갑제: 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핵심입니다. 이번 여행을 오기 전에 누가 제 사이트(www.chogabje.com)에 이런 말을 적어놨습니다. ‘신라같은 북한, 백제같은 대한민국.’
이 말이 뭐냐 하면 북한이 마치 과거의 신라처럼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핵개발과 대남공작 등을 벌이면서 힘을 키우는데 반해 대한민국은 잘 먹고 잘 살다보니까 과거의 백제처럼 나태해져 북한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바로 신라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신라가 처음부터 거대한 뜻을 가지고 삼국통일을 추진해 나갔다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까 통일을 이룩했다는 겁니다.
저는 김유신이라는 인물을 우리 역사의 第一(제일)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가 만났던 진천 군수께서는 조금 앞서나간 이야기를 하시던데 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단군까지 올라가면 좀 복잡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한민족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바로 삼국통일에 의해서 한민족이라는 단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라통일이 우리 민족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곧 신라통일의 제일 元勳(원훈)인 김유신이 우리 민족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분에 대해서 이어령씨가 옛날에 쓴 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유신이 천관녀와 사랑을 하다 자신의 잘못을 비겁하게 말한테 돌려서 말의 목을 쳐버렸다며 김유신을 비겁한 사람이라면서 서양의 유명한 사람들과 비교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만 그건 권력의 속성을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의 왕족과 결혼함으로써 권력을 향한 1단계에 진입합니다. 그 다음에 김유신은 자기의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하게 만듦으로써 권력의 한복판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권력을 만들었기 때문에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김유신은 전략, 정략, 모략 이런 것의 名手(명수)였던 것입니다.
김유신을 평가할 때는 정직한 사람 뭐 이런 일반적인 도덕 기준으로 보면 안됩니다. 김유신이라는 인물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뤄낸 사람이다보니까 필요에 따라 나쁜 짓도 할 줄 알고 좋은 일도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지킨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그런 표현을 썼는데 김유신은 장엄한 생애, 이순신을 비장한 세계라고 했었습니다.
김유신은 굉장히 大器晩成(대기만성)했습니다. 우선 권력관계를 보면 647년 선덕여왕 때 毗曇(비담)의 난이라는 쿠데타 음모가 일어났습니다. 왜냐. 선덕여왕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자니까 당시 上大等(상대등)이던 毗曇(비담)이라는 귀족이 우습게 보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또 당나라의 부추김도 한 원인이 됐습니다.
그때 누가 당나라에 갔다왔는데 당 태종이 ‘아, 거기 신라는 여자가 왕이던데 그 여자 가지고 되겠나’라는 말을 듣고 옵니다.
이런 말까지 전해지자 비담은 선덕여왕을 여자라고 얕보고, 당나라를 믿고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쿠데타는 김유신이 진압을 합니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선덕여왕이 죽어요. 그 다음에 또 여자가 왕이 됩니다. 바로 진덕여왕입니다. 진덕여왕이 즉위 8년 만에 죽은 다음에 새로운 왕을 뽑게 됩니다.
그때는 왕을 추천으로 뽑았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추대했냐 하면 그때 화백 제도라는 게 있잖아요. 화백제도에서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왕을 뽑습니다. 이렇게 귀족들이 화백 회의에 모여서 閼川(알천)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런데 알천이라는 사람이 김유신의 눈치를 보니까 김유신이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자진사퇴하고 김춘추를 추대합니다. 김춘추는 곧 왕이 되고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입니다. 결국 김춘추는 김유신이 만든 왕인 셈이죠. 그렇다고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거만하게 행동했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660년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칩니다. 당시 소정방은 13만 군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소정방은 그 餘勢(여세)를 몰아서 신라까지 먹으려고 했어요. 이를 눈치채고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신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이 회의를 하면서 어떻게 할 거냐 물어보니까 김유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습니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 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란을 당해서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여기서 주인은 당나라고 개는 신라입니다.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친 것은 고마운데 우리까지 없애려고 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게 신라적인, 또는 대한민국적인 자주국방 정신 아닙니까. 그래서 딱 싸우려고 하니까 소정방이 눈치를 채고 그냥 갔습니다. 가서 당 고종에게 귀국 신고를 합니다. 당 고종이 수고는 했는데 왜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소정방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신라가 비록 나라는 작지만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아랫 사람은 윗 사람 모시기를 父兄과 같이 여기니 나라는 비록 작으나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을 한 소정방은 서역 평정도 하고 신강성 등에는 소정방 전적비도 많습니다. 소정방은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잘 싸우는 장수였습니다. 또 당시의 당나라는 지금의 미국처럼-아까 이 선생님의 말씀대로-가장 국제화된 나라였고 그 중에서도 고종 때가 가장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당나라의 가장 전성기 때 최고의 명장이 신라라는 나라를 어떻게 봤는가를 이 문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작지만 안으로 똘똘 뭉쳐있고 임금, 신하, 백성이 효도와 충성으로 무장돼있어 함부로 도모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신라가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중국의 後唐書(후당서)에 쓰여 있던 말을 삼국사기를 쓸 때 인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걸 보면 김유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대기만성형입니다. 그 이유는 660년 백제를 망하게 할 때 김유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갔습니다. 그때 김유신의 나이가 예순 여섯입니다.
그 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당나라가 고립이 됐습니다. 그때 당나라 군대에 군수 보급을 위해서 갔을 때 나이가 일흔이었습니다.
그리고 668년에 평양을 함락시킬 때는 일흔 다섯의 老將(노장)이었습니다. 삼국지의 조자룡이 일흔 넘어서 선봉에 서고 한 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초인적인 사람입니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것은 673년입니다. 676년에 당나라가 완전히 한반도를 포기하기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문무왕이 찾아와 마지막 문병을 할 때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부탁을 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요점만 이야기하면 ‘創業(창업)보다 守成(수성)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통일을 이루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걸 지키려면 人和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유신 列傳(열전)을 읽어보면 인용할만한 문장이 참 많습니다. 예컨대 고구려를 치러 갈 때 김유신이 직접 출전을 못하니까 사령관이 와서 어떻게 할까 묻습니다. 김유신은 ‘백제도 오만해서 망했고 고구려도 지금 오만함으로 망해가고 있으니까 우리의 정직으로써 적의 굽은 곳을 치면 이긴다’고 말합니다. 정직을 뭐라고 표현할지 여러 가지 해석에 따라 틀리지만 하여튼 우리의 정직으로 적의 굽은 곳을 치면 이긴다고 말합니다.
요새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싸운 것은 잘한 것이기는 합니다. 왜 강력했던 고구려가 신라에게 망했느냐 하는 것을 노태동 교수라고 신라 역사를 전공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간단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건 태종무열왕과 연개소문의 인간을 비교해보면 안다.’ 즉 인간의 차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세계인이고 연개소문이란 사람은 영유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울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사람입니다. 나중에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는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당나라로 도망가기도 하고 신라에 붙기도 하는 등 제대로 관리를 못했습니다. 이것의 원인을 노태동 교수는 인격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우리가 삼국통일의 원천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역사상의 지도자를 보면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이라는 삼총사의 이런 콤비네이션이 없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굳이 유사한 사례를 고른다면 1860년에서 1870년 사이 독일이 통일할 때 비스마르크의 외교(김춘추에 해당), 몰트케의 군사(김유신에 해당), 빌헬름 1세의 정치력(문무왕) 정도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아까 이 선생님의 말씀하신 대로 복수심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건 부여에서 말씀드려야 실감이 날 거 같습니다만 먼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삼국사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자왕에게는 扶餘隆(부여융)이라는 태자가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붙잡힌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때문에 우리 누나가 죽었다. 그것 때문에 몇 년 동안 내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슬퍼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삼국통일의 출발이 대야성 싸움에서 김유신의 사위와 딸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간 것에서 시작됐다는 겁니다. 이것은 옥천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모욕했다는 것에 대한 백제의 복수와 거기에 대한 신라의 복수. 이런 복수가 계속 이어진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입니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이제 묘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탑들이 그렇죠. 그 다음 묘의 둘레를 보면 어느 방향, 어떤 곳인지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서남북으로 하고 그 다음에는 시간별로 자, 축, 인, 묘 등 12地支(지지)를 둘러서 새겼습니다. 여기 제일 북쪽이 뭡니까. 쥐(子)입니다. 남쪽은 말(午)입니다. 그 다음에는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12地支를 새깁니다. 항상 왼쪽으로 갑니다. 이런 형식이 삼국통일 前期(전기)에는 완벽하게 유지되다가 말기에는 형식만 남게 됩니다.
저는 2000년, 3000년 전의 무덤을 발굴현장에서 수없이 봅니다. 고분 발굴현장 에서 보면 지금이나 그 당시나 무덤을 만드는 큰 풍습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무덤을 만들때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을 특별한 계기로 완전히 새로 바꾸지 않는 이상 아버지가 예전에 무덤을 만들던 대로 만듭니다.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을 비슷하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 이어지기 때문에 2000년 전이나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덤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신라와 고구려가 다릅니다. 신라는 圓形(원형)으로 돼 있고 고구려는 方形(방형ㆍ사각형)으로 돼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같은 것을 보면 딱 方形입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丸都山城(환도산성)도 方形으로 돼 있습니다. 백제가 지배한 서울의 위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의 溫祚(온조)가 고구려 출신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하다가 능산리 쪽으로, 부여쪽으로 가서는 이 원형 봉토분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백제도 항상 고구려처럼 方形, 신라는 원형 봉토분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예외적으로 방형 고분이 두 개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는 경북 울산의 은현리 積石塚(적석총)이 있습니다. 이곳은 于尸山國(우시산국)이라는 소국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의 것이냐. 제 생각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 신라에서 倭를 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정병 5만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어떤 장수가 病死(병사)해서 묻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불국사의 방형분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설에 의하면 김대성의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12지신상을 둘렀지만 방형으로 만들어진 고구려 형식 무덤입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다 보셨으니 이제 황룡사지 9층 목탑터로 이동하겠습니다.



13. 통일염원을 담았던 名作, 황룡사지 9층목탑

못 하나 안쓰고 20층 건물 높이의 목탑을 세운 신라의 건축기술은 현재의 대한민국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

편집자注: 13편은 경주 황룡사터에서 황룡사지 9층 목탑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자, 여기가 황룡사터입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게 다르죠. 여기 잔디가 있는데 잔디가 겨울에 죽어갈 때는 굉장히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여기를 볼 때 핵심은 이겁니다. 당시 신라가 황룡사를 짓는 데 93년 걸렸습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부터 지었고 목탑은 선덕여왕 때부터 세웠습니다. 절 전체를 짓는 데는 553년부터 93년이 걸립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9층 목탑터가 바로 저깁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건 황룡사 9층 목탑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높은 목탑이라는 정도입니다. 탑의 높이가 80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20층 건물 높이죠. 그 탑을 못 하나 쓰지 않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건축 실력으로 할 수 있느냐. 그게 안됩니다. 5공화국 당시에 시멘트로 한 번 만들려고 시도하다 안했고 지금도 문화재청 등에서는 이 황룡사지 목탑을 어떻게든 복원해보려고 하는데도 할 수가 없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목수들을 다 동원해도 탑을 복원할 실력이 안된답니다. 할 수 없대요.
우리가 착각하는 게 신라시대에는 컴퓨터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그런데 뭐가 대단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문명의 利器(이기)가 없으면 사람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옛날에 시골에서 살 때, 텔레비전이 없을 때는 하늘의 별을 보고 상상력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하늘을 안보고 삽니다. 텔레비전에서 정해진 시간대로 방송해주는 프로그램만 머리에 입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시대보다 상상력도 부족하고 사고력도 없는 편이라고 봅니다. 문명도 지금이 더 발달한 거 같지만 지금은 흉내만 낼 뿐이지 그대로 만들지 못하잖습니까.
옛날에는 오히려 더 문명의 속도가 빨랐습니다. 왜 빨랐냐 하면 어떤 민족이 이동하면 그 문명을 그대로 가지고 이동하죠. 신라도 저 북방에서 온 민족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이동하면 자기들의 문명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이 자리가 어디냐 하면 丈六尊像(장육존상)이라고 해서 1丈 6尺짜리 불상이 있던 곳입니다. 1丈이 3미터니까 불상의 높이는 4미터 80센티미터 정도됐을 겁니다. 요게 立像(입상)이 있던 자리입니다. 참고로 불상의 뒤편을 光背(광배)라고 합니다. 뒤편 전체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몸에서 나는 빛을 身光(신광), 머리에서 나는 빛을 後光(후광)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게 불상을 세우는 받침대 자리입니다.
여기 보시면 홈이 파여있죠. 이게 본존이 서있던 자리고 여기에 협시가 서게 돼 있었죠. 본존과 좌우 협시입니다. 여기가 절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금당터이고 금당터 앞이 목탑이 있던 터입니다.
지금 문화재청에서는 레이저 홀로그램을 가지고 밤에만 가상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보이도록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이저가 잘 보이게 하려면 배경 스크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이 과연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그게 또 다른 흉물이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즉 실제 목탑은 세울 수 없으니까 레이저로 하는 걸로 추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이 계속 이어져 오다가 완전히 불타 사라진 것은 몽고의 3차 침입 때입니다. 고려 고종 때인 1238년에 불타 사라졌습니다.
저게 뭔지 현장을 한 번 보시죠. 황룡사 9층목탑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인 목적입니다. 신라의 서라벌은 분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 곳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80미터 높이의 전망대를 만들어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던 겁니다.
이 황룡사 목탑은 서라벌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여기서 동서남북을 보세요. 동쪽에는 토함산, 서쪽에는 우리가 금방 다녀왔던 西岳(서악), 선도산이라고 합니다. 남쪽에는 남산, 뒤에는 조금 허전하지만 동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있는 소금강산이 있습니다. 소금강산을 北岳(북악)으로 봤습니다. 이렇게 동서남북의 가장 중앙에 세운 것이 황룡사입니다. 여기에 세운 탑 위에서 주변을 보면서 外敵(외적)이 오나 안오나 감시했던 것입니다.
아까 선덕여왕 당시 일어났던 반란 이야기를 드렸죠. 정부군은 저기 半月城(반월성)에 있었고 반란군은 明活山城(명활산성)에 있었습니다. 보문단지 가는 길에서 우측에 있는 산이 바로 명활산입니다.
참고로 그 당시 전투는 지금처럼 전면적으로 전투하는 게 아닙니다. 각 진영의 대표들이 한 명씩 나와서 싸웁니다. 거기서 이기거나 지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김유신이 대단한 전략전술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신라는 5만 명의 군사로 최소한의 피해만 보면서 백제를 점령해야 하는 반면 백제는 계백이 5000명의 결사대로 죽을 각오로 싸우는 거였습니다. 계백의 부대는 어차피 죽을 거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백제를 사수하자는 거였습니다.
이러면 아무리 10 대 1의 싸움이라 하더라도 신라의 입장에서는 싸움이 제대로 안되는 겁니다. 한 쪽은 피해를 적게 보면서 싸워야 되고 한 쪽은 죽기살기로 달려드니까 신라가 수적으로는 많아도 심리적인 면에서 이미 열세였던 거죠. 그래서 심리적인 면 때문에 처음에는 밀리죠. 그래서 필요했던 게 화랑입니다.
이때 그 유명한 관창이 등장합니다. 관창이 나와서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러면서 나갑니다. 나갔다가 계백에게 잡혀 살아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니가 전투를 하러 갔다가 창피하게 살아서 오냐’ 그럽니다. 관창은 다시 계백에게 도전합니다. 결국 계백은 관창의 목을 쳐서 돌려보냅니다. 이 모습을 본 신라군들이 분노하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결국 역사대로 된 거 아닙니까. 저는 이런 게 대단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이쪽으로 오십시오. 요것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이제 점심 맛있게 드실 거니까 마지막 공부해야 됩니다. 여기 돌이 보이시죠. 이것이 기둥을 세우던 터입니다. 여기가 탑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지금 바람이 많이 불죠. 이런 바람 속에서도 버티는 80미터 높이의 목탑을 세웠다는 겁니다. 지금도 세울 수 없다는 탑을 못 하나 쓰지 않고 만들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지금보다 건축실력이 더 뛰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아래에 보면 원래 사리가 있었습니다. 보통 불탑은 사리를 모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리는 2층 탑신이나 3층 탑신에 주로 보존합니다. 그런데 황룡사 9층 목탑의 사리는 이 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불타고 흔적만 남았어도 사리는 누가 가져가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나중에 이 아래에서 꺼낸 겁니다. 사리장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큰 구멍은 중심을 잡기 위해 쇠를 사용했던 자리죠. 그렇게 중심을 세워서 80미터 높이로 쌓은 거에요. 상상해 보세요. 탑의 규모는 주변에 보이는 주춧돌의 범위만 했을 겁니다. 불국사도 임진왜란 이후에 다 불타버린 것을 새로 지은 겁니다. 불국사가 燒失(소실)된 후 그 후의 조선 왕들이 복구를 하고 영정조 시대로 이어지다가 박정희 때 완성한 겁니다. 그게 옛날 불국사의 10분의 1입니다. 돌은 불이 나도 안 상하죠. 그러니까 주춧돌 흔적을 가지고 대충 계산해서 새로 복원한 겁니다. 불국사도 하나도 흔적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복원한 것이었습니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을 지금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건 원래 복원하려면 그나마 옛날과 유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기술로는 옛날 방식대로 복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박물관에 가보면 대강 모형만 만들어져 있습니다만 그건 추정이고 원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또 이 정도의 유물 복원이면 돈도 수 조원이 듭니다. 요즘같이 살기 힘든 상황에서 국민들 중 누가 이걸 수 조원을 들여서 복원하자고 하겠습니까.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상황에서 힘들죠. 저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조갑제: 여기가 통일의 염원을 담아서 만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돌(심초석)을 한 번 만져보세요. 그럼 통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에서 오신 분들 있잖습니까.
자, 여기를 보면 다들 9층목탑을 복원했으면 싶으시죠. 그런데 저는 이걸 복원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불국사도 박 대통령 시절에 안짓는 게 나았을 거 같아요. 그 터에 가서 느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역사인데 말이죠. 박 대통령 당시의 불국사 복원, 그건 복원이 아니라 새로 만든 거 아닙니까.
아까 陵(능)을 보시면서 그 속에 뭐가 들었느냐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으니까 왜 안파느냐고 물으시는데 그건 안파고 놔두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유적지를 다 파버리면 나중에 후손들은 뭘 연구하겠습니까.
발굴을 흔히 파괴라고 합니다. 무턱대고 발굴을 하면 어떤 것은 보존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상하게 됩니다. 지금 天馬圖(천마도)도 보존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처음 발굴 때보다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니까 발굴은 보존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처리기술이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진시황릉의 위치를 알면서도 발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속에 굉장한 유물들이 많을텐데도 말이죠.
제가 도굴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적석목곽분은 도굴하기 어렵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그런데 그 적석목곽분을 도굴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주 교동에 가면 1972년에 발견된 작은 아기금관이 있습니다. 그 도굴꾼이 그걸 팔다가 잡혔습니다. 결국 추적을 해서 도굴꾼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도굴했느냐 물으니까 집에서 했답니다. 대체 어떻게 도굴을 했는지 궁금해서 제가 그 집에 찾아가봤습니다. 그 집에는 도굴꾼이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도굴했는지 좀 더 상세히 물어봤습니다.
이 도굴꾼이 그 주변을 지나가다 보니까 무너진 돌벼락같은 게 있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이게 왕릉급 고분이었다는 겁니다. 도굴꾼이 주변을 살펴보니까 고분 옆에 집이 있었답니다. 도굴꾼은 나중에 그 집에 전세를 들었습니다. 그 집에 살게 된 후에는 부장품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서 땅굴을 뚫었습니다. 몇 달 동안 밤에만 작업을 했답니다. 그 땅굴이 부장품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맞췄던 겁니다.
이 사람 말이 그 무덤에서 귀걸이, 금관 등의 유물이 300점 이상 나왔답니다. 그래서 유물들을 와르르 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전문도굴꾼들은 물건을 제 값 받고 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나까마’라고 부르는 중간상인들을 통해 유물들을 박물관에도 팔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아기금관을 모 그룹 회장에게 유물을 팔려고 했다가 그룹 회장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걸린 겁니다.
제가 가보니까 무척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선물로 계란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계란이 선물이니까요. 그 사람은 유명한 도굴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또 다른 이야기가 이 곳 황룡사지를 도굴했답니다. 밤에 자동차용 工具(공구)를 가지고 와서 했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기인 것 같습니다. 황룡사 금동사리함이라고 하니까. 이걸 도굴한 다음 단순한 금조각으로 보고는 뜯어서 조각조각 팔아버렸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황수경이라고 박물관장을 하던 사람이 이걸 다시 조각조각 사모았습니다. 하여튼 그 일이 떠오릅니다. 참, 이 탑은 백제 사람인 아비지가 감독을 했다고 하죠?

이재호: 맞습니다. 그 당시에 백제와 신라가 적대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같이 교류를 하지 않았었나 생각됩니다.
아까 신라는 철학이 발전했다고 했는데 백제는 공예가 발전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제 지역은 비옥하지 않습니까.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공업이 발전합니다. 무엇을 만들고 그러면서 손재주가 발달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굉장히 전투적인 성격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넓은 황야에서 언제나 外敵과 싸워야 하는 생활입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고구려는 전투적이었고 백제는 비옥한 환경 덕분에 예술적이었습니다. 백제는 지금도 판소리부터 예술적인 부분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경상도는 산골이죠. 출세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안동같은 곳은 주로 시험보러 서울로 갔던 겁니다. 안동 지역이나 다른 경상도 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우리가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14. 경주 최 부자집의 숨은 이야기

"박상진 義士 일과 일본 당국의 도움을 받은 것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80~90%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편집자注: 14편은 점심 식사 후 경주 최 부자집과 월정교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원래는 여기 올 계획이 없었는데 여러분들께서 식사도 아주 우아하게 잘 하시고 그래서 보너스로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유적지라서 왔습니다. 인용사터도 가는 길에 살짝 둘러보고 목적지인 감은사터로 가겠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경주 최 부자집입니다. 지금 보이는 여기가 바로 사랑채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옥을 지을 때 이어진 공간으로 짓지만 옛날에는 철저히 분리가 돼 있었습니다. 저기는 안채입니다. 안채는 보통 ‘ㅁ’ 자로 돼 있습니다. 안채는 부인들의 공간, 사랑채는 바깥 분들의 공간입니다. 철저히 분리돼 있는 개념입니다. 부부가 合房(합방)을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함께 있었지 완전히 떨어져 생활했습니다. 경주시에서는 관광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여기 불에 탔던 사랑채를 새로 짓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씨 집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벼슬을 하되 進士(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며느리는 자기 집이 아무리 부유했더라도 시집와서 3년 동안은 비단옷을 입지 마라 등 이런 식으로 검소하게 살라는 말 등입니다.
그래서인지 요 근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가문을 보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조용원씨가 쓴 ‘종가집 이야기’라고 하는 책이 많이 팔렸습니다. 조용원씨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없지만 公的으로 보면 ‘종가집 이야기’라는 책에서 최씨 가문의 좋은 부분만 적어 놓은 게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 집안 사람들은 특별해서 처음부터 좋은 일만 했는가’ 생각하게 될 겁니다. 사람이란 것은 죽을 때까지 후회하는 존재고 조금 잘못한 게 있다 하더라도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최씨 가문 사람들은 완벽하게 잘난 사람들이라고 적어 놨습니다. 여기 책에 나온 최부자집에 대한 것은 서울 종가집에 가서 종손에게 말을 듣고 적은 것 아닙니까.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는 독립운동을 하는 게 가장 큰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독립운동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처럼 실력을 키우자는 것도 있고 안중근 선생처럼 적을 암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한광복회에 박상진 義士(의사)라고 있었습니다. 원래 기득권을 갖지 않은 사람이 그랬을 때는 별볼일 없습니다. 그러나 잘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거에요. 박상진 義士는 원래 평양에서 판사를 했어요. 집안도 만석꾼 집안이었습니다. 박상진 義士는 나라를 잃게 되자 그 길로 ‘나는 독립운동 하겠다’며 판사를 그만두고는 군자금을 얻기 위해 조선의 돈 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닙니다. 만약 군자금을 안주면 죽이고. 그래서 경북 칠곡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장택상씨의 아버지인 장성원씨도 죽입니다. 뭐 그런 식으로 해서 좀 급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대에 빨리 독립을 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서른 여덟 살에 대구에서 교수형으로 죽습니다. 박상진 義士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최준이라고 지금의 윗대 분인데 박상진 義士의 사촌 처남 됩니다. 당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 박상진 義士고 재무국장이 최준씨입니다. 그런데 박상진 義士는 그때 독립운동을 할 때니까 문제가 생길까봐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사촌 처남의 명의로 다 해놨습니다. 그런데 박상진 義士가 죽고 난 다음에 최준씨가 ‘이 재산은 내가 돈을 주고 다 산 거다’ 해가지고 박상진 가문이 완전히 몰락해버립니다. 또 지금으로 하면 워크아웃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일본 당국에서 보증을 서서 사업이 성공한 적도 한 번 있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는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대구에 대학도 설립하는 등 전반적으로 봤을 때 80~90%는 좋은 일을 했습니다.
조용원씨 같은 경우에는 이겁니다. 두 가지죠. 이런 사실들을 아예 몰랐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이 책을 잘 팔리게 하기 위해 안 쓴거죠. 이 책이 10만 권 정도 팔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요새는 글도 많이 쓰고 합니다. 최씨 종가집에서도 이 책을 700권 정도 샀답니다. 자기네 자랑거리를 써놓은 거니까. 물론 책 팔기 위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80~90% 잘났으면 그건 잘난 겁니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점, 이건 이해가 잘 안간다든지 하는 부분이 있어야 우리같은 보통 사람도 노력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데 ‘이런 사람들은 완벽하게 잘났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점이 좀 아쉽습니다.
다른 이야기인데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궁이 이 근처이지 않은가 싶어요.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신라 것입니다. 서울에서 오신 분들은 이해가 안될지 몰라도 여기 있는 건 전부 1000년이 지난 유적들입니다. 石塔(석탑)도 그렇고 石築(석축)도 그렇고. 특히 여기 집집마다 들어가보면 석탑이니 해서 좋은 게 많이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문화도 수용하면서 발전하는데 비해 유교는 다른 것은 철저히 파괴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경주 박물관에 가보면 목잘린 부처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제 시대 때 일제가 저지른 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아까 황룡사 갔다가 나오는 길에 분황사가 있죠. 분황사에 보면 완벽한 신라 우물이 있습니다. 거기에 다 처넣은 겁니다. 누가 했냐 하면 우리 선조들 중에서 글 좀 아는 사람들, 양반들이 불교 배척한다고 그런 겁니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좋은 점도 있지만 조금 시야가 좁고 안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저기는 쌀을 저장하는 창고, 곳간입니다. 저기에 약 1000석의 곡식을 보관해서 주위 사람들이 힘들고 굶을 때 도와줬다고 합니다.
여기가 유명한 月精橋(월정교)라고 하는 곳입니다. 여기가 원효대사가 물에 빠져 가지고 요석궁에 가서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눠서 설총을 낳게 됐다는 전설이 있는 터입니다. 자, 다들 편안하게 않으세요.
물소리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일 때라고 합니다. 물소리가 도란도란하고 들리는 정도, 지금처럼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방해가 안되는 정도의 물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합니다.
자, 여기를 왜 왔느냐 하면 이 뒤쪽이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있던 요석궁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가다 원효대사가 물에 빠졌던 겁니다. 그래서 옷을 말리러 요석궁으로 들어가서 열흘 정도 있으면서 깊은 사랑-원래 짧은 사랑이 깊어요-을 나눈 끝에 설총을 낳게 됩니다.
이건 있습니다. 원효 대사는 7세기 사람이고 이 다리는 8세기 것입니다. 왜 원효 대사와 이 다리가 있던 시대가 차이 나느냐 하면 원효 대사가 원래 건넜던 다리는 이 다리가 아니고 조금 더 작은 것이었고 이 다리는 경덕왕 때 만든 다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다리가 月精橋(월정교)인데 日精橋(일정교)라고 또다른 다리도 있습니다. 다리가 해와 달을 의미하죠. 이것 말고 박물관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똑같은 규모의 다리가 있습니다. 저 밑에는 칠성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지 다리에 얽힌 사연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우리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역사 유물을 보실 때, 탑을 보든지 왕릉을 보든지간에 여기에 이것을 왜 여기에 만들었는지, 왜 이 크기로 만들었는지 등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하며 감상하는 것이 가장 공부가 잘 되는 방법입니다.
자, 그러면 왜 이 다리는 크게 지었을까. 지금은 하천에 물이 이 정도지만 1300년에는 이것보다 엄청 깊었죠. 지금 준설을 안한 상태가 이 정도라면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었겠죠. 이 쪽이 바로 宮城(궁성)입니다. 半月城(반월성). 그리고 이게 南川(남천)입니다.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 정도의 하천이었습니다. 당시에 남산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었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저 산을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다리의 길이와 폭이 신라 때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앉아계신 돌들도 전부 이 다리를 만들 때 썼던 겁니다. 1300년 전에. 대단한 거죠. 토목기술도 완벽하죠. 돌을 가지고 이어서 만들었다는 것은 보통이 아닙니다. 저기 보면 다리 기둥에 부딪힌 물이 갈라지게 유선형으로 돼 있죠. 이 다리도 우리 시대에 복원하려고 해도 실력이 안되는 겁니다. 자, 저는 이 정도로 하고 겠습니다. 이제 감은사지로 가시죠. 오늘은 감은사지까지만 보면 일정이 끝나지 싶습니다.



15. "나는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

삼국통일의 발자취를 찾아서(14편): "나는 속세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맛봤다. 그러니 한 마리 짐승이 되어도 상관없다"

편집자注: 15편은 감은사지 석탑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분량이 길기 때문에 上·下 편으로 나누어 연재한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여기가 感恩寺(감은사)지 석탑입니다. 이건 아마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태종무열왕은 일단 백제를 제압했습니다만 고구려까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하죠.
전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진 사람은 물론 더 비참할 것이고 이겼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보문단지에 묵으실 기회가 있으시면 암곡동 무장사지에 들러보세요. 전쟁이라는 것은 이제 그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무장사입니다. 거기를 가려면 개울을 건너고 하면서 10리를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곳에 가셔야 역사 유적의 진면목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여기는 뭐냐 하면 문무왕이 왜를 진압하기 위해 짓다가 생전에 완성을 못하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마무리한 곳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자, 반도는 통일했다. 그러면 이제 倭가 신경쓰인다. 그러니까 내가 護國龍(호국룡)이 되도록 해달라.’ 그래서 여기에 절을 세웁니다. 만약 백제가 통일을 했다면 아마도 군산 정도에 이런 걸 세우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왕조를 불문하고 거의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내가 통일을 했다’ 그러면 뭔가 기념사업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절과 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시는 탑은 지금 위에 상륜부가 없는 상태인데 당시 상륜부가 있는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까무라칠 정도의 탑이었다고 합니다. 3층 석탑으로서는 가장 컸다고 합니다.
이런 예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일례로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저 멀리 북쪽으로 보시면 용이리 석불이 보이실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바로 漢城(한성)에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하기 위해서 세운 겁니다. 그 다음에 안동에 가시면 제비문 석굴이 있습니다. 그건 신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경계를 표시한 겁니다. 또 백제 부여 쪽으로 가시는 길에는 후백제 시대에 개태사 부근에서 왕건과 견훤이 마지막에 전투를 했지 않습니까. 그 쪽으로 보면 충남 논산 관촉사에 있는 은진 미륵이라고 아시죠. 거기 보면 불상이 큰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王建(왕건)이 後三國(후삼국)을 통일하고 자기 왕조를 開創(개창)하면서 백제 세력에게 내가 좀 잘났다는 것을 뽐내기도 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敎化(교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상대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잘 났다, 우리 세력이 좀 크다’ 하는 자랑과 ‘이제는 우리와 같이 하자’는 유화적 태도가 항상 같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념 사업물들은 美的인 부분은 다음 문제고 일단 규모가 커야 합니다. 그래서 은진 미륵불상도 별로 멋이 없죠. 이 감은사지 석탑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아름다움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규모가 큰 게 최우선입니다. 그런 식으로 출발합니다. 그게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동양 제일’로 나오는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세요. 70~80년대 보면 방송에서 ‘동양 제일’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그러죠. 우리는 이제 큰 거 가지고 폼잡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느냐 이게 문제지. 옛날에는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 걸 보면 이런 건축물들도 하나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거죠. 이 시대는 삼국을 통일한 급박한 시기에 기념사업으로서 했다 그 정도로 아시면 됩니다.
이게 해량입니다. 불국사에도 해량이 있습니다. 해량은 國刹(국찰)에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소규모 사찰은 안되고 국가적으로 만든 사찰에만 만듭니다. 위엄있는 절에서 일반 신도들은 불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죠. 이건 일단 불당에 못들어간 신분이 낮은 사람을 위한 목적도 있고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도 있는 등 다용도입니다.
여기는 석탑 수리를 위해서 차량 진입로를 만든 겁니다. 여기를 한 번 볼까요. 제가 모두 설명하면 끝도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하고 저 위에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아직도 학계에서 뭔지를 몰라요. 우리가 책에서 배울 때에는 박영효가 신사유람단에 갈 때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 태극 문양이 있습니다. 이것은 周易(주역)에 나와 있는 겁니다. 周易은 생활의 지혜입니다. 점 치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 옆에 톱니바퀴처럼 생긴 게 있죠. 제가 周易을 조금밖에 모르지만 저 톱니바퀴가 陰陽(음양)을 나타내는 게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陽陰陰陽陰陽(양음음양음양)이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태극기에 卦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주역의 八卦(팔괘)죠. 우리는 乾坤坎離(건곤감리) 이런 걸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 시대에는 이게 이미 생활화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신라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탑을 보시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항상 왼쪽이 높은 지위를 의미한다고 그랬죠. 여기가 동탑, 저기가 서탑입니다. 방향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좌우를 동탑, 서탑으로 구분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과 지는 곳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東宮(동궁) 마마는 들어봤어도 西宮(서궁) 마마는 못들어봤죠. 왜냐. 동궁은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고 서쪽은 폐위된 것을 말합니다. 왕비가 폐위되면 서궁으로 보냅니다.
저는 저녁 노을을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해돋이는 금방 지나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항상 동쪽을 중시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탑을 보는 것과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이 두 개의 탑은 크기가 똑같습니다. 이 雙塔(쌍탑)은 신라가 통일된 이후에 처음 만들어진 겁니다. 기중기나 장비가 없었던 옛날에 이런 탑을 만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기록문화가 참 잘 돼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잘 안돼서 그렇죠. 참고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성-지금은 화성이라고 하는데-은 왜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냐 하면 흔적은 없더라도 기록은 남아 있거든요.
여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절을 처음으로 발굴한 겁니다. 1959년일 겁니다. 그 이전에는 일제가 주로 우리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이 절터를 발굴할 때는 민가들이 수십 채 있었는데 민가들을 다 수용하고 발굴하면서 지금처럼 됐습니다.
기록에 보면 감은사지는 문무왕이 동해 용왕이 돼 자기가 쉬어갈 곳으로 만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문무왕이 통일을 이룬 다음에 ‘나는 죽어서 용이 되겠다’ 하자 평소에 친분이 있던 智義(지의)법사가 이렇게 묻습니다. ‘왜 하필 짐승이 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문무왕은 ‘나는 이미 속세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맛봤다. 그러니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속세의 모든 권세와 영화를 가져봤으니 이제는 용이 돼 倭(왜)를 진압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무왕이 이 절의 이름을 鎭國寺(진국사)라고 지었습니다. 鎭護國寺(진호국사)의 준말입니다. 즉 ‘나는 죽어서 倭(왜)를 진압하겠다’ 그랬는데 이 절을 짓는 도중 문무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절을 완성한 후에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感恩寺(감은사)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 위로 금당터가 돼 있었고 이 밑에 문무왕이 여기 머물다가 동해로 나가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와 동해가 연결돼 있지 않았겠나 하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불국사를 보면 石壇(석단)에서 물이 나오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의 소나무 숲과 연결돼 있는데 거기가 옛날에는 연못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당시에 불국사를 완성했는데 그것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대웅전하고 그 사이에서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만들 실력이 안되서 못만든 겁니다. 감은사 복원계획도 불교계에서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죠.
여기를 보실 때는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진면목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석탑이 수리 중이라서 조금 작품이 안좋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하늘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이 여행의 코스에 맞추고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직접 일정을 짠다면 저는 감은사에 올 때는 해거름에 옵니다. 이게 낮에 보면 감동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런데 해가 질 때 오면 逆光(역광)에 비친 거대한 탑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뭔가 굉장히 강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어디어디 갔다왔다’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갔는데 무엇을 봤느냐, 아침에 갔느냐, 점심에 갔느냐, 비가 올 때였느냐, 눈이 올 때였느냐 이런 것을 보셔야 합니다. 가끔 어디어디 갔다왔다고만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대화하기 싫죠. 예를 들어 불국사를 간다고 할 때 저는 몇 번이나 갔겠습니까. 수십 번이 넘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불국사에 가면 하루 종일 둘러봐도 안지겹습니다.
저는 초급자를 데리고는 불국사에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국사의 진면목을 보지 않고 그냥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회가 없어 보지 못합니다만 양동 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회 마을은 좀 상업화돼 있는 분위기고 경주 양동 마을이 좋습니다. 거기 역시도 일반적인 기행을 하면 두 시간이면 다 봅니다만 저 혼자 가면 1박 2일 일정으로 갑니다. 그래도 다 볼 수가 없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집집마다 살펴보고 저 나름대로의 느낌을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시인들이나 글 쓰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은 감동받은 게 없으면서 책에는 ‘사람들이여, 감동받아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감동을 받았다 해도 그걸 글로 전달하면 감동을 받을까 말까인데 말이죠. 그런 건 似而非(사이비)입니다.
지금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으니까 이 탑을 봐도 별 감동이 없죠. 나중에 석양이 지고 해 그림자가 넘어가고 이럴 때 보시면 그리움이 사무치면서 마음 속에서 뭔가가 올라옵니다. 다음에 그런 기회를 만드시라는 겁니다.
어쨌든 문무왕이 이 절을 짓다가 죽습니다. 저는 이 문무왕의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만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유언입니다. 이걸 의역하면 이럴 겁니다.
‘세상에 아무리 잘난 영웅도 나중에는 무덤에 들어간다. 여우와 토끼가 굴을 뚫고 목동들이 올라가서 피리를 불고… 세상이 한낱 덧없으니까 내가 죽으면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열흘 뒤에 창고에서 나를 불태워서 뿌려라’ 이렇게 나옵니다. 기가 막히죠.
신라 시대에 火葬(화장)을 한 왕이 일곱 명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지금까지 화장한 왕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걸 권하고 싶어요. 앞으로 청와대 들어가는 사람들이 공약으로 자기가 죽으면 묘를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뿌리라는, 散骨(산골)하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윗 사람이 솔선수범을 해야 아랫사람들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의 代案(대안)으로 납골당을 보급하고 있는데 그것도 차지하는 공간만 적을 뿐 또 하나의 매장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散骨(산골)을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상관없었습니다. 땅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지금은 매장한다는 게 어렵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우리에게도 자연으로 순환시키는 문화가 필요한 겁니다.
거기 덧붙여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묻었더라구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무덤을 계속 파헤치다가 나중에는 출입문을 만들어서 가족을 합장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이 자연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 수 있지 만약 우리가 전부 아버지, 할아버지 묘 관리하듯이 하면 살 곳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등지가 전부 과거의 묘터입니다. 부모님 세대에서 하던 대로 묘를 관리했다면 지금 우리가 아파트를 짓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에 대해 風水的(풍수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왜 여기에 만들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다와 가깝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利見臺(이견대)에 가실 겁니다. 그곳이 원래 산 위였습니다만 지금은 길 밑에 있습니다. 이견대를 산 위에 만든 이유는 바다도 지켜야 되고 사람도 살아야 하니까 바다 근처의 산 위에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풍수적으로 ‘이 곳이 용의 송곳니다’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라 시대에는 풍수가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풍수는 다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풍수를 안믿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만 하나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정약용 선생과 관련해서 이런 기록이 나오더라구요. 조선 시대에는 풍수의 영향력이 엄청났습니다. 訟事(송사)의 대부분이 풍수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땅 싸움이죠. 당시 어떤 풍수쟁이가 정약용 선생에게 와서 그랬습니다.
‘영감님, 이 자리만 쓰시면 三代 동안 정승이 나옵니다. 멋진 자리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소리에 안넘어갈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정약용 선생이 딱 한 마디
한 겁니다.
‘야, 그렇게 좋으면 니네 아버지 써라, 왜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풍수쟁이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자기가 써야죠. 저는 이 정도로 끝내고 이어서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6. 대한민국은 제2의 신라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모두 文武 양쪽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만 있으면 실패합니다.

편집자注: 16편은 감은사지 석탑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우리가 지금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는 거 맞죠. 우리나라에서는 방향을 정할 때 왼쪽, 오른쪽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왼쪽이 동쪽과 일치합니다. 그것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에서 방위를 정하기 때문이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남쪽에서 북쪽을 보지 않고, 북쪽에서 남쪽을 보면서 방향을 정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민족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 속의 방향 감각이 북에서 남을 기준으로 하게 돼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 머릿속에는 항상 남쪽 지향입니다.
그걸 어디서도 볼 수 있느냐. 유행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남쪽과 관련된 유행가가 굉장히 많습니다. 남행열차, 남쪽 나라 십자성 등등. 제가 노래방에 가서 찾아보니까 10여 개 정도 되더라구요. 그런데 일본에 가면 북쪽 관련 노래가 많습니다. 일본은 남쪽과 관련된 노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건국될 당시 우리 민족이 가야에서 건너가서 北上(북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민족마다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김일성이 남침을 했던 모양입니다.
이건 여담인데 세계적으로 남쪽과 북쪽이 싸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북쪽이 이겼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이 이겼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월맹이 이겼죠. 독일에서도 북쪽에 있던 프러시아가 통일을 했고 이탈리아도 북쪽에 있던 사르디니아가 통일을 했습니다. 예맨도 남북 예맨이 붙었을 때 북 예맨이 통일을 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도 대부분 북쪽에서 내려온 국가가 통일했습니다. 그게 참 미스터리입니다. 남북이 싸우면 왜 북쪽이 승리하느냐. 유일한 예외가 신라입니다. 남쪽에서 일어난 나라가 통일한 건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역사는 남한이 중심이죠. 그러니까 대한민국 주도로 통일이 될 거 같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거쳐온 게 아까 황룡사에서 통일해 달라고 기원해서 통일을 이루고, 이 탑은 통일된 다음에 만든 탑이니까 일종의 완결편입니다. 이 탑을 완성시킨 사람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입니다. 우리 고대사에서 신문왕이라는 사람의 위치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말하길 신문왕 때 와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그동안 통일 전쟁을 하면서 귀족의 힘도 빌리고 이랬지 않습니까. 신문왕이 집권한 다음에 그 귀족들을 곧 숙청합니다. 반란 모의가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삼국통일 전쟁 당시 공이 있었던 사람들 상당수를 숙청합니다. 자기 장인도 죽이고 당시 국방장관도 모의에 대해 신고하지 않았다고 꾸며서 죽여버립니다. 그 결과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니다. 절대 왕권을 만든 사람이죠.
신문왕릉이 저 쪽에 있는데 아주 크고 아주 잘 만들어진 능으로 왕권의 상징이 될 만하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그 능이 하나의 표준형이죠.
문무왕의 마지막 유언이 정말 문학적이고 멋집니다. 그런데 문무왕의 실제 유언 속에는 倭를 상당히 두려워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요. 삼국유사 등에서 해석을 그렇게 한 거 같은데 나름대로 이유는 있습니다.
통계를 내보니까 백제, 신라, 고구려 중에서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나라, 전쟁 횟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신라입니다. 신라의 전쟁횟수가 왜 가장 많았냐 하면 가야하고 전쟁하고 백제하고도 전쟁하고 고구려하고도 전쟁하고 倭하고도 전쟁을 했습니다. 네 나라하고 전쟁을 하다보니까 전쟁 횟수가 많았다는 겁니다. 반면 백제는 倭하고 전쟁할 일이 없었고 가야하고는 친하게 지냈죠.
삼국통일은 항상 말씀드리지만 국제전쟁이었습니다.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한 신라가 성장하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치고 왜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백제가 망한 게 660년인데 백제는 생각보다 쉽게 망하지 않았습니다. 660년 사비성에서 항복을 했지만 곧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라크 식으로 곳곳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꽉 묶여 버렸습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이 援兵을 보냅니다. 기록에 의하면 배 400척을 건조해서 약 3만여 명을 보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군산, 장항 근방인 금강 하구에서 663년에 ‘白村江 전투’라는 게 일어납니다. 이 전투에서 倭軍은 전멸합니다. 대신 돌아갈 때 백제 사람 5000여 명을 싣고 돌아갔다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전투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이겨서 그런지 삼국사기에 두 줄 정도만 간단하게 묘사됩니다. 이 백촌강 전투를 계기로 해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합니다.
그 전에는 자기의 모국인 가야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군대를 보내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왔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자기네끼리 일본에서 나라를 잘 만들자 해가지고 자기 나라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邁進(매진)합니다. 그 결과 701년에 가면 나름대로의 헌법을 만듭니다. 大寶律令(대보율령)이라는 헌법을 공포합니다. 일본은 701년에 고대 국가를 완성합니다. 그 시기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전인 671년, 그러니까 신라가 對唐(대당) 결전을 한창 치르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정변이 일어납니다. ‘壬申의 亂’이라는 게 일어납니다. 그 결과 天武천황이라는 사람이 집권합니다. 그런데 이 천무천황이라는 사람에 대해 족보 등 여러 가지를 조사한 결과 신라 계통의 渡來人(도래인)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신라 계통 도래인들의 도움을 받았고 아마도 문무왕의 도움도 받았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사람이 집권한 다음에는 수백 년 동안 신라하고 숙적처럼 지내던 정책을 바꿔 처음으로 親신라 정책을 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신라가 당나라와 싸울 때인데 일본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습니다. 당나라에는 사신을 안보내요. 신라에만 보냈습니다. 교류를 하면서 신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먼저 통일을 했고 기틀을 잡았으니까 고대 국가를 어떻게 만드는가,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칠 때 어떤 戰法을 썼느냐 하는 것 등을 배워갑니다. 일본은 신라를 모델로 해서 고대국가를 완성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일본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그렇습니다. 물론 비교적 자기 역사를 바로 보는 일본의 左派학자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돼가지고 670년대부터 690년대까지 30여 년 간 일본과 신라가 굉장히 친하게 지냅니다. 그 시기가 한일 관계가 가장 관계가 좋을 때입니다. 이 30년은 또 어떻게 되느냐.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우리가 당나라를 쫓아내 버리니까 당나라는 화가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성덕왕 때까지 서로 사절을 교환하지 않습니다. 30년 동안 외교 단절 상태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문왕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문왕 때 唐 중종이 사신을 보내 ‘당신들이 왜 태종무열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느냐’면서 불평을 합니다. 자기네 唐 태종과 같은 이름이라고 태종무열왕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신문왕이 ‘아니, 당신네 당 태종도 우리를 도와준 홀륭한 분이지만 우리 태종 무열왕도 통일을 이룩한 분이기 때문에 그에 못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그 요청을 무시합니다. 아무튼 신문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성덕왕 때부터 외교관계가 복원됩니다.
이때 일본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일본도 천무천황의 다음다음이 文武천황입니다. 문무천황도 죽은 후에 火葬을 합니다. 일본 천황 중에서 火葬을 한 게 네 사람인데 모두 문무 천황 다음으로 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 너무 국수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일본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아마도 신라 문무왕의 화장 풍습을 보고 일본의 문무천황도 화장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써놓은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문무왕의 유언을 ‘왜를 두려워해서 자기의 뼈를 여기에 뿌리면 동해의 용이 돼 倭를 막겠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실제 그 시기는 신라와 倭의 관계가 매우 좋은 시기였다는 겁니다.
일본 나라(奈良)에 가면 ‘도다이사(東大寺)’라는 게 있습니다. 가보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목조 건물로는 현재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곳입니다. 도다이사가 만들어진 게 8세기 초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축하 사절 비슷하게 약 700여 명이 갔습니다. 그건 요새로 말하면 좋은 것 만들어졌다고 하니까 관광차 갔다고 보면 됩니다. 그 정도로 교통이 편리했다는 겁니다.
여기 감은사하면 신문왕과 문무왕이 동시에 관계된 곳입니다. 아까 문무왕의 유언을 인용하셨는데 제가 여기 하나 적어왔습니다. 한 번 읽어드릴께요. 저는 문무왕의 유언을 읽으면서 별 감동이 없었는데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일본 학자가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책을 한 권 보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일본 사람으로써 문무왕의 유언을 읽어보니까 세계에서 왕 치고 이런 유언을 남긴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왕이 이렇게 겸손하게 자기 무덤을 크게 짓지 말고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할 수 있느냐 해서 그걸 가지고 논문을 쓴 걸 제가 봤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山谷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북산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王(조조)의 서릉에는 오직 공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騎(만기)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 만다. 樵童牧竪(초동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갖 자재를 낭비하여 허사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그때의 인력만을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열흘이 되면 창고 문(庫門)의 바깥 뜰에서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喪)服의 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國)喪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縣(주현)의 課稅(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 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관원은 곧 시행하라.…」
이것이 이 사람의 유언입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아주 담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문무왕이라는 이름을 참 잘 지은 겁니다. 문무왕이라는 이름은 文武統一대왕, 즉, 통일이라는 것은 文과 武의 합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요새 우리나라처럼 군사적인 것을 폄하하는 식으로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文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 주류 세력들이 모두 文이니까요. 그 당시에 文이라고 해서 따로 지식인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아마도 불교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광법사라든지 원효대사라든지 하는 분들로 대변되는 호국불교로 생각됩니다. 이런 게 합쳐야 통일의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다 하는 통일의 비결을 문무왕이라는 이름 안에 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중에서 불교와 통일 간의 관계를 봅시다. 우리가 흔히 호국불교라고 그러는데 원광법사라는 사람이 ‘世俗五戒(세속오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화랑도의 신념으로 삼도록 했다 이렇게 전해 내려옵니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라는 사람이 당나라에 보내는 상소문을 쓰는데 그 내용이 전쟁을 하려는데 우리를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이 상소문을 쓰라고 하자 원광법사는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승려는 남을 해치거나 전쟁에 개입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원광법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일단 상소문을 쓰기로 합니다. 쓰면서 ‘나는 승려이기 이전에 신라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은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를 잘 정리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의 자비정신을 가지고 신라에서 그대로 밀고 나갔다면 통일이 됐겠습니까. 통일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반대로 연개소문처럼 사람만 죽인다고 통일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래서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 오계에서 살생유택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살생유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요새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물을 죽일 때 언제언제 죽이라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일단 통일 전쟁을 하면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지만 학살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건 피할 수 없어도 양민은 죽이지 말라, 쓸데없는 살인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불교가 최선을 다해서 국가를 뒷받침하지만 또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자비 정신을 통해서 살인은 최소한으로 그치도록 하라는, 그런 균형 감각을 가지라는 뜻으로 봅니다.
저는 신라라는 나라를 이렇게 봅니다. 신라라는 나라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아까 김유신 묘의 12支神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생략의 미를 살리는 기가 막힌 디자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또 문화가 굉장히 너그럽죠. 남녀 관계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할 때는 무섭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신라라는 나라는 하나로 쥘 수 없는, 유연하기도 하고 강직하기도 한 양쪽을 다 가지고 있는 나라. 그것을 文武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모두 文武 양쪽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만 있으면 실패합니다. 고구려는 너무 武斷(무단)쪽으로 가서 실패했고 조선은 너무 文弱(문약)으로 가서 실패했다고 봅니다. 신라가 우리 민족사에서 문무를 동시에 같이 가졌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2의 신라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17. 신라통일의 원동력: 羅唐 동맹과 文武의 합치

“한미 동맹이 무너지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삼국통일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이 보여주는 겁니다.”

편집자注: 17편은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와 신문왕릉, 선덕여왕에 대해 향토사학자 이재호 선생과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利見臺(이견대). 이 곳은 조선시대에 亭子(정자)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옛날의 그 이견대라는 것은 저 산 정상에 가면 그 흔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감은사도 보이고 大王岩(대왕암)도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온 이견대는 우리 시대의 관광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견대는 신라 시대에 주역에서 ‘飛龍在天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뭘 봤느냐 이거 아닙니까. 당시 죽어서 海龍(해룡)이 된 문무왕과 天神(천신)이 된 金庾信(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습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신문왕이 배를 타고 가서 대나무를 잘라 왔습니다. 그것으로 萬波息笛(만파식적)을 만듭니다.
기록을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가뭄에는 만파식적을 불면 비가 오고 적병이 침입했을 때 불면 적병이 물러가는 등 국가통치의 만병통치약과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국가를 깊이 사랑했을 때 나오는 거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최선을 다할 때 국민들도 누가 먼저 뭘 해달라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한민국도 좋은 게 있고 미국도 좋은 게 있고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은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든지 하면 30년이 지나도 끝까지 추적해서 잊지 않고 유해를 찾아냅니다. 대한민국은 그게 좀 안되는 거 같더라구요. 그러다보니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과연 내가 정말 내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울 수 있냐 그런 문제에 봉착할 때 항상 국가와 개인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게 되는데 신라에서는 상하가 一心同體(일심동체)였다는 거죠.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 땅이 더 컸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옛날에는 그 말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가 십몇 년 전에 만주에 가본 다음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니다, 만약에 고구려가 통일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주에 가보니까 하루 종일 달려가도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가 어떻게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몽고도 마찬가지인데 침입할 때, 힘이 강할 때는 그런 벌판이 좋아요. 그런데 지킬 때는 어렵습니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 때 평양으로 환도를 했잖아요. 저는 그걸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계를 깨달았구나. 저는 그런 생각을 일찍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해졌을 때 만주를 어떻게 지킬 겁니까. 항상 강하다면 지킬 수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영원히 지킵니까.
우리나라가 900여 번 외침을 당했고 한 번도 침입하지 않았다 그러는데 저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침입하지 않고 점령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중국역사를 나름대로 공부해보니까 중국을 침략한 민족은 모두 중국에 同化(동화)됐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큰 문화가 있는 나라를 점령하면 처음에는 이길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안에서 지내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중국을 점령했다 그러면 인구가 적은데 통치하려면 한자를 모르면 안되죠. 그러면 결국 우리 민족은 사라졌지 않겠나. 과거의 청나라도 그렇게 군림했어도 지금은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중국을 우리가 점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조갑제 선생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조갑제: 김은정 여사님 여기로 오십시오. 오늘 무슨 의미가 있는 날인 거 같습니다. 여기가 이견대라고 아까 설명서 보셨죠. 신라에 三寶(삼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萬波息笛(만파식적), 天賜玉帶(천사옥대), 丈六尊像(장육존상)입니다.
차 안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신라에 대해서 제일 문학적으로 많이 쓰신 분이 경주 사람인 김동리 선생, 소설 쓴 서정주 선생, 그 다음 김은정 여사의 부친 되시는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이십니다. 김상옥 선생의 시조 중에서 ‘玉笛(옥저)’라고 있습니다. 가곡으로도 만들어졌고 교과서에도 나왔습니다. 시조가 정말 좋습니다. 한 번 낭독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마침 복사를 해왔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님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년을 머금은 채
따스이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오」

감사합니다. 저는 이 마지막이 제일 좋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오.’
아마 이 노래가 윤이상 작곡, 김상옥 작사로 됐었을 겁니다. 이 옥저는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불었을 거 같아요. 우리 이재호 선생한테 연주를 한 번 청해보겠습니다.
이거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지죠. 만파식적이라는 게 한 번 불면 모든 것을 다 잠재우고 나라의 어려움이 있어도 이 피리만 불면 편안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그런 것인데 우리가 온 이 자리에서 불어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표현한 우리나라 문학사의 아주 클래식한 시조를 그 작가의 따님께서 읽어주시고 또 신라를 제일 사랑하시는 이재호 선생께서 연주를 해주니까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는 건 우리 尙美會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모임에는 김은정 여사께서 안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재호 선생님을 하루 종일 따라다녀 보니까 아름다움을 보는 위치를 정말 잘 잡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여행을 하다보면 아주 근사한 곳을 잘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위기 좋은 곳도 잘 찾아주고. 저도 경주에 자주 왔지만 이 자리에서 대왕암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바닷가에서 보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다 해거름에 이 모습을 보는 게 바로 행복이라고 봅니다. 또 이 선생님은 모습도 과거 신라 사람 같으세요. 실제로 신라 사람들이 저 모습 비슷했을 겁니다. 북방 계통이라 얼굴이 남성적이고 각이 좀 져 있습니다.
아까 이 선생께서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우리가 한반도라고 하지만 압록강, 두만강 때문에 하나의 섬과 같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산으로 도망가면 됩니다.
몽고군이 일곱 번이나 쳐들어와도 끝까지 버틴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보통 몽고군이 쳐들어오면 한 달을 버틴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는 40년을 버텼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항복을 했네 해도 끝까지 버티면서 싸우니까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삼은 거 아닙니까. 고려의 왕이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서 큰 소리 쳤지 않습니까. 식민지이긴 했어도 말이죠.
신라 통일이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면 중국 漢族(한족)과 우리 민족 간의 영원한 우호 관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모택동이 쳐들어 올 때까지 신라 통일 이후 1300년 동안 중국의 한족은 한 번도 한반도에 쳐들어 온 적이 없습니다. 그 뒤에 쳐들어 온 것은 금나라, 요나라 등 유목민족과 일본이 쳐들어 왔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나라와 신라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했고 신라한테 당나라가 쫓겨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저건 작은 나라지만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혼난다-거기다 고구려한테도 당해놓으니까-하지만 저 나라가 우리에게 도전할 나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저 나라는 가만히 놔두고 문화적으로 친하게 지내면 된다’
이렇게 ‘삼국통일은 중국 민족과 한민족의 영원한 평화공존을 만든 것이다’ 하는 주장을 손진태라는 사람이 하고 있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나중에 모택동이 쳐들어와 우리의 통일을 막은 것이 하나의 흠으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서 중국이 방해를 안하도록 만드는 게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삼국통일을 주제로 한 여행에서 여기가 제1장이 끝나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그 원인을 하나씩 분석하고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짚어서 재구성하면 남북통일을 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라가 당나라하고 동맹을 맺은 거죠. 가장 강한 나라이면서도 가장 너그러운 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미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가장 강한 나라,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입니다. 6·25사변 때 50만 명 보내서 그 중 5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쳐도 우리에게 뭘 달라고 한 게 없습니다. 미국이 우리한테 제주도를 달라고 했습니까. 오히려 그때 우리를 도와주고 물건 만들면 사주고 했습니다. 바로 이 한미 동맹이 무너지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삼국통일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이 反證(반증)하는 겁니다.
그 이외에 문무왕, 文과 武의 합치, 그 다음에 나라 전체가 一致團結(일치단결)했다는 소정방의 이야기처럼 官, 民, 軍의 단결,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상으로 여기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이재호 향토 사학자: 간단하게 신문왕릉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삼국 중에서 首都(수고)를 한 번도 옮기지 않은 나라가 신라입니다. 고구려는 집안(국내성)에 있다 평양으로 옮기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백제도 위례성, 한성에 있다가 공주,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통일 전부터 통일 후까지 끝까지 경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달구벌(현재의 대구)로 천도를 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 당시 수도가 좀 커졌으니까 옮겨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랬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왕 때 들어서 고대사가 정립됐다고 조갑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國子監(국자감)이 아마 그때 들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들어왔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거죠. 다만 공식적으로 가령 불교같은 경우에는 고구려 327년, 백제 384년 신라 527년 이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공인됐다는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이해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신문왕릉은 분위기가 좋습니다만 지금 산업도로를 짓고 있어서 자동차 소음이 좀 심합니다. 능 자체는 참 좋습니다. 12지신상을 두른 것은 아니고 받침석 마흔네 개를 둘러 놨습니다. 현장에 가서 한 번 보시죠.
여기가 신문왕릉입니다. 왕릉으로써의 위엄은 가지고 있습니다. 받침석은 마흔네 개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습니다. 이 왕릉같은 경우에도 산업도로 공사현장 옆이고 기차가 옆으로 다녀 보존에 불리한 환경에 있습니다.
저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곳이 낭산입니다. 저기에 왕궁인 반월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성 중심입니다. 평지의 읍성은 중국에서 들어왔습니다. 고려 말에 주로 등장하는데 기득권이 생기고부터입니다. 없는 사람은 전쟁이 나면 그냥 산으로 도망가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기득권이 많은 사람은 갈등이 생기죠. 그래서 신라도 힘이 약할 때는 매월산성에 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488년 소지왕 때 평지로 내려옵니다.
저 앞으로 보이는 곳이 四天王寺(사천왕사)입니다. 이 라인이 신라의 가장 핵심 라인입니다. 아까 잠시 말씀드렸던 四天王寺(사천왕사)같은 경우 일단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당나라가 침략해 들어올 때 文豆婁(문두루) 비법을 저기서 외웠다고 합니다. 절을 지을 틈도 없어 벽을 쌓지도 못하고 비단으로 주변을 가리고는 밀교 비법을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를 건너던 당나라군이 풍랑을 만나 전멸했다고 하죠. 그후 당나라에서는 사람을 보냅니다. ‘너네가 어떻게 했길래 우리가 실패했나를 보러 왔다’ 하니까 신라에서는 ‘당신네의 실패를 빈 게 아니라 당나라 황제를 위해 빌었다’며 望德寺(망덕사)로 데려 갑니다.
이 좋은 왕릉에 와서 소음 때문에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가서 안타깝습니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선덕여왕 쪽으로 해서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조그만 산에 효공왕릉이 있고 그 뒤로 진평왕릉이 있고 보문리 사지 등 저 라인이 가장 신라적인 분위기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오늘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조갑제: 불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는 제일 처음 소수림왕 때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백제로 들어왔습니다. 신라에는 상당히 늦게 들어왔습니다. 150년 뒤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공인된 시기입니다. 불교는 그 이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퍼지고 있었습니다. 승인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殉敎(순교)에 의한 겁니다.
백제, 고구려는 무조건 불교를 공인했는데 왜 신라에서는 저항이 있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즉, 신라에서는 불교보다도 더 나은 무슨 신앙같은 게 있었다는 거겠죠.
외국 게 더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우리 것이 좋은 게 있는데 왜 받아들이느냐 했다는 거죠. 더 좋은 게 뭐냐. 儒彿仙 중에서 仙에 해당하는 것, 샤머니즘이라고도 볼 수 있고 토속신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있다가 외래 신앙이 들어오니까 충돌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서 백제, 고구려보다도 신라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불교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니까 여과 과정을 거친 거죠. 무조건 받아들인 것과 저항을 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는데 해보니까 잘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나와가지고 한국적 민주주의, 이건 한국적 현실에 맞춰야 한다고 하면서 維新도 일어나고 결국 총에 맞아 죽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에 맞게 민주주의가 바뀐 거죠.
반면 필리핀은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필리핀은 민주주의를 먼저 하다보니까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고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도 좋지만 우선 경제를 발전시킨 다음에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하는 식으로 해서 한국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튼 외래 문물을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무조건 받아들인 예가 조선이 주자학을 받아들인 겁니다. 무조건 받아들이다보니까 중국보다 더욱 敎條的(교조적)으로 변했고, 그러다 보니까 조선 왕조가 그 모양으로 망해버렸습니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더 교조적인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도 조선조의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 한국은 외래문물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현실에 맞게 받아들이는 여과과정이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재호 향토사학자: 자, 여담으로 선덕여왕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선덕여왕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떻든 우리나라의 최초 여왕이라는 점에서 비중이 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게 선덕여왕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알기는 아는데 왕릉이 어디 있는지, 선덕여왕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모릅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 ‘知機三事(지기삼사)’라는 설화가 있죠. 하나는 당 태종이 모란꽃을 선물하니까 ‘이 꽃은 향기가 없다’ 그럽니다. 왜인가 물었더니 그림에 벌이 없다 그럽니다.
그 다음에 靈廟寺(영묘사)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저게 뭐냐 하니까 ‘개구리가 운다는 것은 화를 낸 것이다. 병사 2000명을 데리고 빨리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군사를 무찔러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까 정말 백제 군사 500명이 숨어있어서 무찌르고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게 됐냐 물어보니까 서쪽은 흰색을 의미하고 여자는 음이다. 서쪽에는 여근곡이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남근은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은 이겁니다. ‘내가 몇년 몇월 며칠 몇시에 죽으니까 도리천에서 장사지내라’ 그럽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물으니까 낭산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37년 뒤엔가 사천왕사가 서게 되는 거죠. 불교에서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입니다. 그 중턱에 사천왕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知機三事(지기삼사)’입니다.
저는 이런 설화보다도 선덕여왕 당시에 어떤 걸 만들었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덕여왕 때 만든 것이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 그리고 동남산에 있는 ‘龕室(감실)부처’입니다. 그것도 선덕여왕을 모델로 만들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저는 이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사람들을 보면 잘난 사람들이 좀 많지 않습니까. 당대의 교양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서양의 아폴로가 어떠니 아프로디테가 어떠니 비너스가 어떠니 이야기하면서 조금 우아하게 행동하면 굉장히 교양있다고 인정해줍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기가 태어난 곳에 대한 예의로라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교양인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도 잘 모르는 그리스 로마 신화, 감정도 없는 걸 외워서 써먹는 걸 보면 정말 무식하게 보입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무식하다고 해주십시오.
또 하나는 영화이야기입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영화는 열네 편인가 됩니다만 선덕여왕 영화는 아직 한 편도 못봤습니다. 감독들이 역사를 몰라서 영화를 안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감독들이 전부 감각적인 것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역사 영화가 없습니다. 여기서 저와 인연을 맺은 학생들만이라도 교양있는 행동을 위해서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이야기하시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신라도 모르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무식하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18. 황산벌 전투와 尙武 정신

"조선이 왜 망했느냐. 바로 文弱해서, 尙武 정신이 없어서, 군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편집자注: 18편은 부여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지역감정, 황산벌 전투와 尙武(상무)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이제 우리는 논산으로 갈 겁니다. 논산이 황산벌 아닙니까. 제 2훈련소에서 훈련받으셨던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훈련소 노래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계백 장군 무덤이 있습니다. 1600년대에 손질을 했다가 최근 다시 보수를 했는데 거기를 구경하고 부여로 갈 겁니다. 부여에 도착하면 조금 늦을 거 같습니다. 부여에 가서 식사를 한 다음에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에 갔다가 정림사지로 갈 겁니다.
백제가 망하기 전에 만든 탑이 두 개가 있습니다. 定林寺(정림사)지 탑과 미륵사지 탑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平濟塔(평제탑)이라고 그랬습니다. 요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정림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후에 새로 뚫린 논산-천안 고속도로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7시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는 신라 중심으로 유적을 보셨는데 이제는 백제 유적지를 보실 겁니다. 아마 분위기가 조금 다를 겁니다. 두 나라의 유물을 비교하면서 보시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충청도하면 백제라고 생각하실 텐데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죠. 같은 충청도라도 진천에서는 김유신을 모시고 부여에서는 백제를 중심으로 계백을 모시는 걸 보면 지역마다 다른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신라니 백제니 하고 뭉뚱그려서 보면 안맞는다는 겁니다. 현장 향토사를 중심으로 구석구석 다녀봐야 뭔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향토사는 굉장히 정직합니다. 왜냐하면 중앙에서 만드는 官學, 정부가 주도하는 역사는 잘못하면 御用으로 변해서 국가 중심, 민족 중심을 부르짖으며 우월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일본이 그 예입니다. 나라(奈良)나 도쿄(東京)에서 보는 역사와 규슈(九州), 시마네(島根)에서 보는 역사가 조금 달라요. 지방에 가면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방에 다녀보면 지역감정을 넘어서는 鄕土愛(향토애)를 발견하게 됩니다. 때문에 괜히 圖式的(도식적)으로 백제, 신라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 지역감정의 발달을 백제, 신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겁니다. 그건 최근 수십 년 동안 정치인들이 역사를 이용해 먹으려고 만든 겁니다. 예컨대 견훤이 경북 상주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백제, 신라를 들먹이면서 전라도, 경상도 싸움으로 몰아간다는 게 웃깁니다.
지역감정이나 인종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나 다 있는 겁니다만 선동하는 정치인만 없으면 괜찮습니다.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선동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잠재돼 있던 악감정들이 격화되면서 결국 서로 죽이는 상황도 나타납니다.
최근의 사례가 유고슬라비아입니다. 티토 대통령 당시에는 6개의 지역이 연방을 구성해서 잘 살았습니다. 티토가 죽고 냉전이 와해되니까 세르비아 지역에서 세르비아 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들은 과거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역사까지 들먹이면서 너는 이슬람이고 너는 그리스 정교고 우리는 가톨릭이다 이렇게 서로 구분하면서 싸웁니다. 그들은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에서 인종청소를 한다며 몇십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하여튼 인종주의나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선동하는 정치인들은 세상의 毒입니다.
신라가 통일한 다음에 잘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제, 고구려 遺民(유민)들을 별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정복국가같으면 멸망한 나라의 遺民들을 노예로 만들고 핍박했을 텐데 그런 게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나라와 싸울 때는 백제, 고구려 유민과 신라 사람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돼 싸웠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나라의 민족주의가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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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학도병으로 많이 간 중학교의 순위를 한 번 매겨봤습니다. 그랬더니 군산에 있는 학교가 1위를 했습니다. 두 번째가 경북중학교였습니다. 학도병이 대구 지방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소년병들도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오니까 학교에서 지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지원입대한 경우도 있습니다. 전사한 사람이 약 2500명 된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전부 열네 살, 열다섯 살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희생을 戰史(전사)로 잘 써야 하는데 늘 이스라엘 예만 들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최근에야 전쟁기념관에 명단을 새겨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오신 선생님들 중에서는 해군 출신들이 세 분 계시죠. 우리 해군이 6·25 당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아십니까. 6·25 사변이 나자마자 북한은 게릴라들을 부산에 침투시키려고 배를 내려보냅니다. 제 기억으로는 6월 26일입니다. 6월 26일 새벽에 이 배는 부산 앞바다에서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과 만나게 됩니다. 백두산함이 이 배를 격침시켰습니다. 당시 북한 배에 타고 있던 인원을 약 700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게 만약 우리 후방에, 부산 근방에 상륙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 백두산 호라는 배가 재미있습니다.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배인데 태평양을 넘어오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700톤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배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 와서는 한 달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이 해전을 대한민국을 살린 해전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해전이 1950년 6월 26일 새벽에 부산 오륙도 근방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이것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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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래방에서 말씀을 들었는데 정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시면서 문무왕 역할을 맡으신 적이 있으시다죠? 그 연극 제목이 元述郞(원술랑)이었다고 합니다. 원술랑은 교과서에서 배우셔서 아시죠. 요새 아이들에게 원술랑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아이들에게 원술랑과 관창에 대해서 아느냐고 한 번 물어보세요. 알 거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원술랑은 실화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술랑은 김유신의 아들입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싸울 때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왔습니다. 본인은 전투에서 죽으려고 했지만 부하가 억지로 구해서 왔습니다. 그걸 안 김유신은 화가 났습니다. 전투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는 敵前(적전) 도망이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문무왕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무왕이 알아보니까 사형에 처할 일이 아닌 겁니다. 원술랑이 사형되지 않자 김유신은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며 부자 간에 義絶(의절)해버립니다.
원술랑은 작심을 하고 다시 전쟁에 나가 對唐(대당) 결전을 할 때는 크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김유신이 죽었습니다. 원술랑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들어가려 하자 사람들이 못들어가게 막습니다. 이럴 수 있느냐 해서 어머니에게 만나자고 하니까 김유신의 부인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내 남편이 너를 아들로 보지 않았으니 나도 너를 아들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원술랑은 중이 됐다는 이런 스토리입니다. 연극 속에서는 원술랑이 고간이라는 당나라 장수의 목을 베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흔히 아시는 買肖城(매초성) 전투라는 게 있는데 675년 고간이라는 사람이 지휘한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가 전투를 한 겁니다. 그게 마지막 對唐 전투 중의 하나입니다. 원술랑이 고간의 목을 벴다는 것은 시나리오상의 설정을 위한 것인 거 같고 실제는 아닙니다. 관창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면 원균 꼴이 납니다. 원균에 대해서 이렇게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조정에서 功臣都鑑(공신도감)이라는 것을 만들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던 사람들의 점수를 매겼습니다. 1등 공신이 세 사람 있습니다. 누구냐하면 이순신, 권율, 원균입니다. 이건 잘 모르셨죠.
그런데 지금 알려져 있는 것은 원균은 역적이고 이순신은 충신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서 원균을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이건 좀 잘못된 거죠.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이 원균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미워하고 경멸했다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난중일기에서 원균 욕하는 것을 찾아보면 약 스무 번쯤 됩니다. 그 내용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굉장히 꼼꼼하고 선비같고, 외유내강인 스타일인 반면 원균은 호탕하고 술 잘 마시고 이런, 좀 건달끼가 있는 그 정도의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원균이 사실 그렇게 무리한 전투를 한 게 아니고 나중에 패전해서 육상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것이 치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본인이 하기 싫은 전투를 권율이 억지로 밀어서 한 것 아닙니까.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질 전투를 안합니다. 열두 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이유는 질 전투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까 좀 괘씸하거든요. 자기가 전투하러 나가라 했는데 이유를 대면서 안나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러가지고 고문하고 파면한 겁니다.
장수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기 병력을 보전하는 겁니다. 자기 병력이 날아가버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길 전쟁만 한다는 이야기는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은 원래 이길 전쟁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겁니다. 지는 게 뻔한 전쟁을 왜 합니까.
그런데 위에서 보기에는 이순신이 뺀질뺀질하게 빠지니까 원균을 내보낸 겁니다. 원균은 무모하게 나갔다가, 그것도 자기가 나선 게 아니고 위에서 억지로 시킨 전투에 갔다가 패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순신이 당할 것을 원균이 대신 당하고 욕도 대신 먹은 겁니다.
이래서 원씨들이 굉장히 불만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에 원균을 나쁘게 표현하면 소송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내막을 보니까 원씨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겁니다.
신라에서 그와 관련된 것이 관창의 이야기입니다. 현장에 가면 제 말씀을 듣고 느끼기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蘇定方(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가 서해를 건너 덕적도에 상륙하기로 했습니다. 신라는 5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왕과 김유신이 직접 출전을 했습니다. 원래 약속은 두 군대가 7월에 어디선가 만나기로 한 겁니다. 그 상태에서 진격을 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유신의 군대는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와 논산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논산에서 대결을 하게 됩니다.
당시 부여가 방어하기 좋은 곳은 탄현이라는 곳입니다만 이상하게 황산벌로 나가 넒은 곳에서 겨루게 됩니다. 이게 좀 잘못된 거죠.
당시 계백 장군의 군사는 5000명이고 신라는 5만 명입니다. 이게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인구는 백제가 더 많았는데 왜 5000명밖에 동원할 수 없었느냐 하는 겁니다. 일설에는 당시 왕권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부하들이나 지방 토호들이 병력 동원을 제대로 안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나당 연합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몰라 병력을 분산배치해서 동원하지 못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하여튼 백제는 병력 동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660년 7월 10일 황산벌 전투가 벌어집니다. 삼국사기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날짜까지 댈 수 있습니다. 황산벌 전투는 하루 정도 있었습니다. 이틀사흘 가는 持久戰(지구전)이 아니라 넒은 개활지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하루 만에 끝났습니다.
계백은 출전할 때 자기 가족들을 다 죽이고 일종의 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합니다. 그러니까 전투에서 매번 신라군이 졌습니다. 이럴 때 김유신이 쓰는 수법이 있습니다. 불리하면 자기 부하를 특공작전으로 보내서 죽게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보여줘 부하들을 흥분시켜서 달려들도록 만드는 이런 수법을 여러 번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중에서 김유신이 원술랑을 왜 괘씸하게 생각했느냐 하는 답이 나옵니다. 자기는 자기 부하들을 그런 식으로 죽였는데 자기 아들이 살아돌아온다는 게 말이 아니다 하는 이런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백제의 강력한 저항으로 황산벌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시 부사령관이던 품석이 자기 아들 官昌(관창)을 내보냅니다. 계백 장군이 관창을 포로로 잡아 투구를 벗기니까 아직 어린 소년인 겁니다.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뭐 이런 것들이 있나. 이건 죽였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한다’고 생각해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내니까 관창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쳐들어 온 겁니다. 그러자 계백이 다시 붙잡아서 이번에는 관창의 목을 쳐서 목을 매달아서 신라군에 돌려줬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라 군대가 흥분해서 쳐들어가 백제군을 이겼다는 게 다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관창이 그렇게 죽기 전에 盤屈(반굴)이라는 사람이 똑같은 식으로 죽었습니다. 이 사람도 소년 화랑입니다. 반굴은 누구의 아들이냐. 김유신이 대장군이고 그 옆에 부사령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품석이고 하나는 欽純(흠순)입니다. 이 반굴은 흠순의 아들입니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입니다. 그러니까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였던 겁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부사령관의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반굴과 관창이 이런 특공대 요원으로 소모품처럼 된 거죠. 그러나 그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러일 전쟁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여순 요새를 함락시키려다 3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때 노기(乃木) 대장이라는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요새를 공격하는 전술이 시원치 않은데다 신무기였던 기관총이 설치된 토치카 때문에 인명손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기서 노기 대장은 자신의 두 아들을 전사케 합니다. 결국 여순 요새를 점령하게 됩니다.
러일 전쟁을 이기고 나서 메이지(明治) 천황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노기 대장의 성격으로 봐서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는 노기 대장에게 자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노기 대장은 그 명령을 받고는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천황이 죽은 이틀 후 부부가 함께 할복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일본 소설가가 그 부검결과 같은 것을 가지고 꼼꼼하게 조사해 쓴 소설이 있어요. 좀 참혹한 이야기인데 그 부부가 죽기 전날에도 평상시처럼 손님을 접대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자살을 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찌른 거죠. 과연 부인도 죽고 싶어 했겠느냐 하는 것은 조금 의문입니다.
자살 문화라는 게 있습니다. 자살 문화는 명예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나타납니다. 로마 시대에 자살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통일시대에 자살이 많습니다. 일본은 요새는 자살을 가끔 합니다만 옛날 무사 시대에는 할복자살이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일본 武士道(무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살 문화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하라키리(割腹)라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사형하고는 다릅니다. 사형은 징벌이고 하라키리는 무사가 명예를 지키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라키리를 허용하는 것은 봐주는 겁니다. 스스로 죽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사의 명예를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목을 쳤습니다.
이 하라키리라고 하는 것은 단도로 배를 옆으로 가르는데 그 도중이나 마지막에는 힘이 빠질 것 아닙니까. 그렇게 힘이 빠질 때를 대비해 뒤에서 할복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할복하는 사람이 칼로 배를 가를 때 뒤에서 목을 칩니다. 무사들은 이런 조역을 할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육군장관 아나미(阿南)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終戰(종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천황이 결정한 것이니까 할 수 없죠. 그래서 8월 15일 정오에 항복방송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날 아침에 자살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라키리를 할 때 옆에서 목을 쳐주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는 내 실력으로 죽겠다’해서 배를 가르고 피를 쏟으면서 세 시간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사위가 있었습니다. 사위가 ‘제가 도와드릴까요’ 하니까 ‘그러지 마라’고 합니다.
그때 아나미 육군장관집에 누가 놀러와 있었느냐 하면 우리나라 군번 1번인 이형근 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도 하고 하다가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이 사람이 아나미 육군장관의 아들과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휴가나와서 친구 집에 놀러간 겁니다.
그런데 8월 15일 아침에 일어나니까 아나미 육군장관의 부인이 이형근 장군에게 아침상을 차려주고 ‘꼭 아침을 들고 가라’고 하더니 어디로 갑자기 나가더랍니다. 바로 그렇게 나간 게 자신의 남편이 官舍(관사)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 겁니다. 나가기 전에 자기 아들 친구 아침밥까지 다 차려주고 나갔다 이런 이야기를 이형근 장군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형근 장군이 8월 15일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누구를 찾아갔느냐 하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라는 英王 李垠(영왕 이은)을 찾아갑니다. 당시 이은公은 일본군 장교가 돼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던 참에 일본 군복을 입고 있던 젊은 한국인 장교들을 데리고 이은公을 찾아갔습니다.
그 전에는 이은 공을 찾아가도 일본말만 하고 냉랭하게 대하니까 기분이 나빴답니다. 그런데 그 날 이은 공을 찾아가자 비로소 한국말을 하면서 첫 마디가 그러더래요.
“조선이 왜 망했느냐. 바로 文弱(문약)해서, 尙武(상무) 정신이 없어서, 군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귀관들은 돌아가면 제발 군대부터 제대로 키워주기 바란다.” 하는 말을 유언처럼 하더랍니다. 그게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가 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이 왜 망했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自衛力(자위력)이 없어서, 군대가 없어서 망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나라도 마침내 해방 이후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대군을 가지게 되었고 국민 개병제도 실시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군을 만든 겁니다.
최근에는 이런 상무정신이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무정신이 사라지면 대한민국도 그 運(운)이 상당히 나빠질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약하게 될 수 있는 소지가 많지만 지금은 상무정신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 철없이 생활하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는 조금 달라지지 않습니까. 만약 그 군대과정이 없다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이상으로 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9. 한국전쟁의 세 악당: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나쁘게 생각하는지 보면 됩니다.”

편집자注: 19편은 11월 13일 경주를 떠나 부여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해상 무역, 정치인의 비전과 실행, 6·25와 모택동, 한미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아까 말씀드린 백두산호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두산함은 원래 미군에서 PC(Patrol Corvette)함이라고 불렀습니다. 哨戒艇(초계정)이라는 거죠. 700톤짜리입니다. 이 배를 인수해서 우리나라에 도착한 게 6·25 사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입니다. 최근 그 배와 관련된 영화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 배는 해군에서는 하나의 전설처럼 돼 있습니다.
이 배는 2차 대전 때 쓰던 배였습니다. 우리나라 해군이 미국 뉴욕에 가서 이 배를 인수해 오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 뉴욕을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연료가 모자라 하와이에 일단 기항을 했습니다. 거기서 기름 싣고 처음으로 3인치 포를 실었답니다. 그 다음에 괌을 거쳐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 때 배를 인수하기 위해 간 인원이 16명이었습니다. 그 배는 원래 70명이 타야 하는데 16명으로 인수한 겁니다. 당시 백두산함의 인수는 우리나라가 해군 배를 몰고 태평양을 최초로 건넌 겁니다. 한국의 마젤란이죠.
여기 尙美會도 해군과 관련이 많습니다. 우리 회원 중 한 분은 한국 최초의 해군이십니다. 저도 수산대학교를 나왔습니다. 회원 구성들이 그래서 해외 여행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700톤짜리 배를 가지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요새는 20만톤급 탱커(Tanker), 10만톤급 항공모함 등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700톤이면 요즘의 요트 수준입니다. 그걸로 태평양을 건넌 겁니다. 이걸 인수하셨던 우리 회원께서는 그 후에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하셨답니다. 인천 상륙작전 때는 영국 항공모함에 타셨답니다. 당시 항공모함 이름이 트라이엄프(Triumph)입니다. 1961년 인천지구 해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軍門을 나오셔서 지금까지도 파일럿(導船士)을 하고 계십니다.

조선이 왜 망했느냐 이유를 따져보면 우선 尙武 정신이 없어 망했고 그 다음에는 진취적 정신이 없어서, 즉 바다를 멀리해서 망했다고 봅니다.
반면 신라는 달랐습니다.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뭘로 장식하느냐 하면 海戰으로 장식합니다. 676년 당나라가 손을 들고 물러가는,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투는 육상에서 있었던 게 아니라 676년에 伎伐蒲(기벌포)라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기벌포라는 곳은 현재 錦江 하구로 추정됩니다. 기벌포라는 데서 당나라 해군과 신라 해군이 정면으로 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신라 해군이 이기면서 삼국 통일이 완성됐습니다.
신라는 해군을 상당히 중요시했습니다. 兵部(병부)에 船府署(선부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해양부를 만들었습니다. 동양에서 해양부를 별도로 만든 건 신라밖에 없었을 겁니다. 장보고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 신라의 해상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걸 뭘로 알 수 있느냐. 일본의 천태종을 만든 엔닌(圓人)이라는 중이 장보고 시절에 당나라로 갔습니다. 이 때 세 척의 배를 이끌고 갔는데 그중 두 척은 파괴되고 한 척만 남아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당나라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장보고의 부하들 도움을 받아서 공부하고 돌아올 때는 신라 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신라배를 타고 돌아오는 과정이 그의 여행기에 잘 남아 있습니다. 물살을 가르듯이 편안하게 하카다까지 돌아오는 게 쓰여 있습니다. 그때 신라가 동지나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신라 사람의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작은 나라였습니다만 항상 두 가지가 다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엄격하기도 하고 너그럽기도 하고, 文도 있고 武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을 잘 탔습니다. 신라의 지배 민족들은 모두 말 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말도 잘 타고 배도 잘 탔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사는 누가 이끌어 갔느냐. 소총이 발명되기 전인 16세기까지는 말 타던 사람들이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즉, 기마민족 출신들-몽골족, 투르크족 등-입니다. 게르만 민족은 예외적으로 말을 잘 못타지만. 아무튼 이런 사람이 세계를 휩쓸다가 16세기부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니까 그때부터는 배를 잘 모는 사람들이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아시죠.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 다음에 미국 아닙니까. 미국이 해양 국가의 마지막 대제국이거든요.
이 배를 몬다는 것은 대단히 힘듭니다. 배를 몰고 망망대해로 나가면 뭐가 통하겠습니까. 아무리 글 잘쓰고 말 잘한다고 해도 자연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저 앞에 폭풍이 오는데 글 잘쓴다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통하는 건 오직 과학뿐이죠. 과학으로만 자연을 극복할 수가 있으니까 해양민족들은 자연스럽게 과학을 잘하게 돼 있어요. 과학의 힘으로써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모험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다를 경유해서 서로 교통하는 과정에서는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무역을 해야겠죠. 이처럼 바다를 아는 것과 바다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천지 차이입니다.
과거에 동아시아가 잘 나가다가 왜 이렇게 돼버렸냐 하면 중국의 海禁(해금) 정책 때문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올해가 상당히 의미있는 해네요. 명나라 때 鄭和(정화)의 대원정이라는 거 아십니까.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죠.
1405년, 명나라 永樂帝(영락제) 시대에 정화라는 宦官(환관) 출신 제독이 대함대를 만들었습니다. 함대 규모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배가 수백 척에 병력이 2만7000여 명이었습니다. 함대의 큰 배는 요새 톤수로 몇천 톤이 되는 배였습니다. 이들은 스리랑카에도 갔다가 마다가스카르까지 갔습니다.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약 80년 전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수집도 했습니다. 정화의 함대는 7차에 걸쳐 대항해를 했습니다. 그게 600주년 되는 해가 올해입니다.
그런데 그후 명나라는 어떻게 되느냐. 정화의 대항해가 끝날 무렵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집권했습니다. 새로 집권한 사람들은 큰 배를 만들어 무역하면 처벌한다고 아예 법으로 정해 버렸습니다. 딱 북한이 지금 하는 식이죠. 해상 봉쇄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폴 케네디가 쓴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에 보면 명나라의 해상 봉쇄령이 내려진 이때부터 동서양 힘의 균형이 逆轉(역전)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때 세 척의 배를 이끌고 갔습니다.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이 세 척인데 그 배의 크기가 약 250톤 정도였습니다. 반면 정화가 대원정을 할 때 가져갔던 배 중 큰 배는 약 2000톤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해상봉쇄령이 내려지고 무역을 못하게 되니까 서양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고, 무역을 안하니까 외국 정보에 어둡게 되고 이런 이유로 서양의 과학기술에 밀리면서 결국 중국은 18세기, 19세기에 들어오면 아편 전쟁을 시작으로 영국에게 지고, 프랑스에게 지고 나중에는 결국 먼저 근대화를 한 일본에게도 쥐어박히는 등 약 100년 동안 서구 열강들에게 뜯어먹히는 나라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모택동이 1949년에 중국을 통일한 다음에 다시 중국이 성장하는 것 아닙니까. 중국이 급상승하는 겁니다. 중국이 잠에서 깨어난 거죠.
지금 우리나라 바로 옆에서 세계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중국이라는 인구 13억의 나라가 연평균 경제성장률 9%의 성장을 25년 연속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가 될까 말까입니다. 하지만 연평균 9%의 경제성장을 앞으로도 20년~30년 더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미 철강, 시멘트, 석탄 등 원자재는 전부 중국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중국은 세계의 거대한 블랙홀입니다. 그러니까 기름값도 올라가고 야단났습니다. 이걸 앞으로 20년 동안 더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13억 인구가 말입니다. 이미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를 합친 GDP가 미국을 능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우리나라는 지금 잘 해서 이 바람을 잘 타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고 잘못하면 중국에 흡수돼 곤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對唐결전을 생각하면서 잘 봐야 합니다. 중국 옆에서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면 역시 미국과 친해야 된다, 가만 있으면 중국에 휩쓸려 가니까 우리와 별 유감도 없고 우리에게 영토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 미국과 친해야 균형이 잡히는 거지 한미 동맹이라는 밧줄을 끊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중국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자석이 중국에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새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해서 경부 운하를 만든다는 계획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 계획은 이명박씨가 처음 한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그 전부터 검토를 한 겁니다. 세종대학교의 朱明建(주명건) 교수가 그 주장을 하면서 책도 쓰고 했던 겁니다.
처음에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잘 믿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명박씨가 가능하다 하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가능한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부 운하라는 것이 지금의 남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것인데 남한강은 충주댐 덕분에 물이 많이 잠겨 있습니다. 이 충주댐과 문경새재 밑으로 터널을 뚫으면 낙동강하고 연결이 되거든요. 지금 우리 토목기술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라서 20㎞ 정도 터널을 뚫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그래요.
경부 운하를 추진한 사람들 이야기는 경부 운하를 만들게 되면 우선 혜택을 받는 곳이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이렇게 되고 그 뚫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자리도 생긴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운하가 물류만이 아니라 관광에도 상당히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배 타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느긋하게 1박 2일 정도로 중간에 거쳐서 내렸다 가는 여행이 되는 거죠. 또 그 코스가 상당히 좋지 않습니까. 산악 지방을 양쪽으로 두고 지나가니까 양쪽이 다 경치가 좋은 데 아닙니까. 어제 이재호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어느 쪽에서 보느냐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는 강을 위에서 내려다 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강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국토의 재발견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도 이건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청계천도 사실 계획은 다 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하느냐의 문제였죠. 그러니까 이명박씨라는 사람은 속전속결에다 판단력이 빠르고 일을 해낼 수 있고 안목이 있고 하니까 청계천 사업을 해낸 겁니다.
요새 청계천에 가보면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많이 옵니다. 또 여기 계신 분들은 걸어보셨겠지만 즐겁게 거닐 수 있게 설계가 잘 돼 있죠. 아주 眼目(안목)이 있고 촌스럽지가 않죠. 지금까지 공무원들이 주도해서 만든 것들은 촌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청계천만은 건축적으로 아주 괜찮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부 운하는 어떻게 보면 그 주변에 있는 각 시·도 지자체에서 찬성하면 청계천보다 더 쉽다는 그런 이야기도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주민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여튼 경부 운하 계획이라는 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야, 그거 하면 참 재미있겠다, 빨리 해가지고 배 타고 국토를 한 번 종단해 봐야겠다’ 하는 생각, 이런 상상력을 가지도록 만드는 게 참 소중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게 하고 ‘개통되면 내가 제일 먼저 타야겠다’든지 이런 식의 꿈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정치가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게 비전(Vision)을 주는 겁니다.
이명박씨를 전번에 만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디다. 박 대통령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느냐. 박 대통령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고속도로, 공단을 만들어 놓으니까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전체가 박정희의 선전장이기 때문에 누가 아무리 깎아내리려고 해도 그게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청계천이 이명박씨의 宣戰場(선전장)이 됐어요. 청계천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이거 누가 만들었지’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청계천을 보고 돌아가서는 ‘아, 거 괜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지금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가능성에서 1등으로 올라선 겁니다.
이명박씨가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전만 있고 실천력이 없는 지도자가 제일 위험하답니다. 비전만 있고 실천력이 없으면 헛소리를 하게 되거든요. 말장난만 하게 되고 사람들 붕 뜨게 만들고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묵묵한 실천력이 필요한 겁니다. 예전 70년대 공무원들이 발령받았을 때 신문에 소개되는 문구를 보면 항상 공통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뭐냐하면 ‘과묵한 실천력’ 이런 표현이 많이 나왔어요. 그 옆에는 ‘컴퓨터 달린 불도저’ 이런 상투적인 표현이 많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근대화를 추진했던 사람들 성격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고 말은 적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大衆(대중) 정치 시대가 되다 보니까 말이 앞서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겁니다. 개혁이라는 말만 난무하고 정작 개혁은 되지 않는 게 지금 한국의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낙동강을 지나다가 보니까 생각나는데 6·25 때 왜 미군이 참전했느냐. 당시 미군이 꼭 6·25 사변에 참전해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전에 애치슨이 ‘우리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필리핀 등’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김일성이 ‘야, 우리가 쳐들어가도 미국이 참전 안하겠구나’ 왜냐하면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이 그렇게 死活的(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곳이 아니라고 誤判(오판)한 겁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6월 25일 전면 남침을 했습니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고향인 미주리州의 인디펜던스라는 곳에 가 있었습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트루먼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must stop the son of bitchs no matter the what."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 개자식들은 여기서 저지해야 한다”고 한 겁니다. 트루먼 회고록을 보면 자기가 그 결정을 하는데 10초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로써는 트루먼 대통령을 잘 만난 겁니다.
이 트루먼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고 그 뒤에도 예비역으로 있으면서 대령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미주리라는 美중부 지방 출신으로 아주 보수적인 성향에다 성격이 칼날처럼 아주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구질구질하지 않고 당당하고 정직한, 전형적인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찍부터 공산주의나 파시즘이나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들을 다 전체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때 소련을 지원하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두 악당이 서로 싸우다 지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약간 사회주의 경향이 있어 소련을 지원했습니다. 아무튼 트루먼은 일찌감치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죽고 난 다음에 거의 공짜로 대통령이 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제일 먼저 결정한 게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는 거였습니다. 그 트루먼 대통령이 6·25 당시 바로 美대통령 자리에 있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 이외의 복잡한 이야기들은 사후에 다 갖다 붙인 말입니다. 대통령이 결심하고 형식적인 절차 후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개입을 명령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나라 운명에 두 번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맥아더입니다. 뭐 트루먼보다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죠. 이 맥아더라는 사람도 희한한 사람입니다. 맥아더의 군 경력은 당시 미군 중에서 최고였습니다. 맥아더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당시 70대였습니다. 김유신하고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이 필리핀에 있을 때 연설문을 써주는 부관이 나중에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대령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아버지도 육군참모총장, 맥아더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아주 묘한 인연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었느냐. 이 사람은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적화된 중국을 수복해야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끌던 UN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진격을 하자 중국은 미국에게 계속 경고를 합니다. ‘한국군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건 아무 말 안하겠지만 만약 UN군이 38선 이북으로 들어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냥 진격해 버립니다.
맥아더의 계산은 무엇이냐. ‘너희들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입하면 더 좋다. 개입하면 이것을 기회로 전선을 중국으로 확전시켜가지고 중국을 수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아도 좋고 개입하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계산으로 중국의 경고를 무시해버리고 올라갑니다.
그때 미국 합참에서 보니까 위험한 상황인 것 같지만 어떻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에 맥아더가 완전히 영웅이 돼버리는 바람에 워싱턴에서 어떻게 컨트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위임을 해버립니다.
그때 고민에 빠진 게 모택동입니다. 모택동은 원래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미군이 개입하면 도와주겠다고 言質(언질)을 줬습니다. UN군에게 밀리면서 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약속을 지켜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까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합니다. 이 회의에서 참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니까 전부 반대를 합니다. 참전하면 안된다. 왜냐. 나라를 만든 지 1년밖에 안되는데다 우선 대만을 점령해서 통일을 완성해야 하는데 괜히 조선의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모택동만 찬성을 합니다. 그래서 회의를 몇 번이나 합니다. 그러나 당시 모택동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개입을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참전하기 위해 군대를 만들고 개입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스탈린은 만약 중공군이 육군을 보내면 우리는 공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공군을 보낼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잘못하면 미국과 세계 3차대전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전을 못한다’면서 약속을 파기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모택동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안그래도 반대 의견이 많은데. 또 2,3일 동안 회의를 합니다. 회의 끝에 ‘그래도 우리는 간다’고 결정해서 6·25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당시 모택동의 그 결정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미 통일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그걸 알고 모택동을 존경한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고 모택동을 존경한다면 모택동의 한국전 개입에 대해 존경한다는 말이 됩니다. 戰史(전사)를 읽으면 모택동 한 사람 때문에 신라 통일 이후에 1300년 동안 이어져오던 한민족과 중국 민족 사이의 우의가 깨진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사람이 청와대에 앉아있다는 겁니다. 戰史를 읽어보면 죽일 놈이 세 명입니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입니다. 김일성이 제일 죽일 놈입니다.
20세기에 사람을 정치적으로 제일 많이 죽인 사람이 스탈린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닙니다. 모택동입니다. 모택동 때문에 7000만 명이 죽었다는 거 아닙니까. 하여튼 戰史에는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게 우리와 직접 관계가 없었던 트루먼, 모택동, 맥아더죠. 그렇게 중국군이 개입하니까 맥아더는 잘 됐다면서 원자폭탄을 써서라도 擴戰(확전)을 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트루먼이 제동을 걸었죠. 그렇게 하면 3차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으니까 전선을 일단 원위치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1·4 후퇴가 시작되죠. 여기 북한에서 내려오신 분들은 아마 1·4 후퇴 때 내려오신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렇게 중공군이 개입해서 밀고 내려오니까 그때는 맥아더가 패닉(Panic·恐慌) 상태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때는 반대로 한국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제주도만 확보한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 구제해야 할 사람들 10만 명 정도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참 난감한 거죠. 그렇게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내려오죠. 맥아더는 한 번 후퇴하기 시작하니까 싸우지도 않고 계속 후퇴를 ! 합니다.
자, 이때 미국이 영국의 제안으로 중국에게 중대한 제안을 합니다. 그때가 1951년 1월 4일 후퇴 다음입니다. 영국, 미국이 합동으로 중국에 대해서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때는 이미 서울이 중국군에 넘어간 다음이고 수원 정도까지 밀렸을 때입니다.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는 제의를 중국이 거부합니다. 만약 그때 휴전합의가 됐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1951년 1월 수원 정도에서 휴전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없어졌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한국이 오늘날 여기까지 오는 데는 우연과 같은 일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美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죽지 않습니까. 워커 장군이 왜 죽었는지 아시죠. 당시 자기 아들이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워커 장군이 자기 아들에게 훈장을 주고 다른 부대로 가는 도중 의정부에서 뒤따라오던 한국군 트럭이 장군의 지프차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렇게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안해서 한국군 트럭 운전사를 당장 사형시키라고 하니까 하우스맨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하던 미군 대위가 이러면 안된다고 말려서 징역 3년인가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임으로 온 사람이 릿지웨이 장군입니다. 가슴에다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공수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장군입니다. 싸움 잘하는 걸로 유명한 장군입니다. 릿지웨이 장군이 8군 사령관으로 와서 전선을 수원에서 막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서 1951년 3월에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이 릿지웨이 장군이 상당히 고마운 사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했든지 서울을 수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릿지웨이 장군이 두 번째로 한국을 살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시 원위치 되니까 이제 휴전하자 이렇게 된 거죠. 그 다음부터 한국에서는 고지 쟁탈전이 시작된 겁니다. 백마고지, 수도고지 등 고지 하나를 뺏으려고 수천 명이 죽는 소모전이 2년 동안 계속 됩니다. 소모전이 계속 되니까 김일성도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휴전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휴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계속 싸우라고 합니다. 계속 싸워서 미국을 한국에 붙들어놔야 다른 곳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전투를 하면서 서로 피를 흘립니다. 휴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흐루시초프, 말렌코프 등이 모여 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독재자 한 사람이 죽으니까 금방 휴전 결정이 나온 겁니다. 4개월 만에 휴전이 결정된 거 아닙니까. 스탈린이 죽기 전에는 스탈린의 권위가 워낙 강하니까 스탈린이 하지 말라고 하면 모택동과 김일성은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 때 워커 장군은 죽었고 워커 장군 다음의 릿지웨이 장군,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이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전투기 조종사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해외 근무경험이 있어 한국전에는 올 필요가 없었는데도 자기 아버지가 8군 사령관으로 있으니까 자원해서 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 폭격하러 갔다가 실종됐습니다. 사령관 아들이 실종되자 대대적인 수색을 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걸 보고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 특별하게 수색하는 것은 불공평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8군 사령관도 죽고 8군 사령관의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 외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군이 몇 명 죽었느냐 하는 게 헷갈릴 겁니다. 3만5000명이 죽었다고도 하고 5만 명이 죽었다고도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전사자 통계를 정확하게 냅니다. 전투중 사망자를 K.I.A라고 합니다. Killed In Action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전투사망자입니다. 그게 3만5000명입니다. 그 다음에 전쟁을 하다보면 사고로 더 많이 죽습니다. 주로 차량사고가 많습니다. 이런 비전투 사망자가 약 1만5000명 정도됩니다. 그래서 총 전사자가 5만 명 정도 됩니다. 거기다 실종자 7000명, 포로 7000명인데 돌아온 사람이 3분의 1밖에 안되니까 이걸 다 계산해보면 약 7만 명 정도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는 1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미국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지금까지 전사자가 2000명입니다. 이라크 전사자의 35배 되는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우리보고 배상해 달라고 그랬습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런 미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맥아더 동상 끌어내린다느니 뭐한다느니 하는 게 도대체 뭘로 보이겠습니까. 입장을 거꾸로 바꿔보면 인간으로 안보이겠죠.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좀처럼 안하죠. 미국 사람들은 세계에서 화를 제일 늦게 내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화를 내면 절대 태도를 안바꾸죠. 지금 미국인들의 화를 돋우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 혼자 다 시킨다더니 나쁜 놈들 몇 놈 때문에 한국 전체가 국제사회에서 이상하게 돼버렸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정부 책임이죠. 정권이 그런 행동을 사실은 비호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말이죠, 맥아더 동상 불법철거를 하지 말라면서 그 이유를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역사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보존해야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맥아더 동상은 나쁜 역사지만 보존해야 한다’ 이 말이거든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말 한 마디 하더라도 ‘맥아더 장군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이렇게 말했다면 노무현 싫어하던 사람도 그것 참 말 잘했다고 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지 보면 됩니다. 노무현이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택동이죠. 노무현이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누굽니까. 이승만, 박정희입니다. 특히 이승만. 또 맥아더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한 모택동은 좋아하고 우리를 구해준 맥아더와 이승만은 증오한다 이러면 이 사람이 어느 편에 서있는 사람이냐. 대한민국 편에 서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죠. 이 사람은 지금 김정일을 주적으로 삼아야 할 헌법 상의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지금 주적으로 삼고 있다 이겁니다. 이상입니다.



20. 계백은 왜 황산벌을 결전장으로 택했나

백제군이 왜 탄현을 지키지 않고 황산벌에서 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계백과 신립은 배수진의 실패사례죠.

편집자注: 20편은 11월 13일 경주를 떠나 부여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계백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지금 우리는 국도쪽으로 나가서 논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논산은 참 희한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백제가 신라에게 망했고 그 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다시 후백제가 고려에게 망하게 됩니다. 당시 아들에게 쫓겨나 유폐돼 있던 견훤은 스스로 왕건을 찾아가서 항복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쫓아낸 아들 神劍(신검)에 대한 억하 심정으로 왕건에게 ‘후백제를 칠 때는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그럽니다. 아들에 대한 복수심이죠. 그렇게해서 결국 후백제는 고려에 의해 망합니다. 그때 신검이 항복한 곳이 또 황산벌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의 백제가 여기서 모두 망한 셈이죠. 거기에 관련된 절도 있습니다.
또 灌燭寺(관촉사)에는 유명한 은진 미륵불도 있습니다. 논산에는 山城도 굉장히 많고 유적, 유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황산벌 싸움이 어디서 있었느냐 하는 것은 찍어 말할 수가 없어요. 사학계에서는 황산벌 전투가 어디냐 하는 것과 탄현이 어디냐 하는 것을 가지고 몇 가지 장소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당시 백제의 忠臣인 成忠(성충)은 신라 군대가 쳐들어온다 하니까 ‘炭峴(탄현)에서 막아야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성충이 말한 탄현이 어디냐 하는 것도 세 가지 설이 있을 정도로 당시의 정확한 위치는 의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 역사기록이라는 것이 대충 적은 것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역사기록을 가지고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되는 겁니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16세기 사람인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실존인물인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베이컨(Francis Bacon)이 筆名으로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썼다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역사를 요즘 책이나 다큐멘터리 보듯이 정확하고 세세하게 알고 싶은데 그렇게 잘 맞춰지지 않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틈새에서 역사소설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역사소설의 그 상상력으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메워주기도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문학과 역사가 서로 共存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계백 장군이 그렇게 죽었으니까 아마 무덤을 만들어 모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옛날부터 무덤을 만들어서 그 분을 모셨지만 17세기가 돼서야 이게 계백 장군 무덤이라고 관리를 하게 됐고 그것을 1976년에 다시 복원을 해서 지금처럼 만든 겁니다. 계백 장군의 무덤에 가보면 詩文(시문) 등이 있는데 그걸 유심히 한 번 읽어보시면 이 고장에서 계백 장군을 어떤 마음으로 모시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백 장군의 무덤 옆에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물이 있는 건 아니고 모조품들을 가지고 재구성을 한 겁니다. 그건 5분에서 10분 정도 둘러보시면 될 겁니다. 그걸 다 보시고 12시 이전에 모이시면 부여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백제의 멸망 당시였던 7월에 김유신이 갔던 길과 같습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내려와서 이 근방 어디엔가 있는 탄현이라는 고개를 지났을 거에요. 주변을 보면 아시겠지만 산이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여(백제)가 수비하는 데 좀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반면 신라의 경주 주변의 산들은 꽤 높은 편이라서 자연적인 방벽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백제가 왜 탄현에서 지키지 않고 황산벌로 왔는가 하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입니다. 숫자가 적으면 고개에서 지키는 게 나은데 왜 이런 개활지에서 1대 10이라는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전을 선택을 했는지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될 거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잘 아시겠지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서 서울로 진격할 때 조정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申砬(신립)이라는 용맹한 장군을 보내서 막도록 했습니다. 신립 장군은 鳥嶺(조령·문경새재를 말함)에서 막았으면 좋았을 텐데 탄금대에다 背水陣(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강을 등지고 싸우기로 한 겁니다. 이렇게 하면 군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운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전략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에 병사들이 사기가 충천할 때는 괜찮지만 오합지졸일 때는 지레 겁을 먹기 때문에 싸움이 잘 안됩니다.
또 그때 우리는 기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왜병은 조총을 가지고 원거리에서 공격해 기병을 모두 격파해버렸습니다. 결국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부대 등이 전멸하면서 그 후에 왜군이 서울까지 진격할 때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수진도 하는 사람이 해야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대의 예로 한니발이 로마로 쳐들어갈 때 유명한 ‘한나의 전투’라는 게 있습니다. 그때 한니발이 배수진을 쳤습니다. 배수진을 치고 자신은 중앙에 있으면서 로마 군대와 싸워서 로마 군대를 완전히 전멸시킵니다. 이 배수진을 잘못 쓰면 위험해진다는 게 신립, 계백의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길이 1번 국도입니다. 이게 아마 목포쪽에서 출발해서 수원으로 연결되는 걸 겁니다. 이 길은 우리나라의 옛날 길을 넓힌 거죠. 남북을 가르는 몇 개의 幹線(간선) 도로가 있습니다. 이 길은 호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것이고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길은 죽령 넘는 것과 추풍령, 조령을 넘는 게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忠谷書院(충곡서원)이라고 계백 장군을 모신 서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원이 선비를 모시는 데 비해 무관, 장수를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여기뿐입니다. 앞에 보이는 저 호수는 塔亭(탑정)저수지인데 굉장히 큽니다.
저를 따라서 계백 장군 묘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제군사박물관을 들러서 12시10분까지 차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앞으로 30분 정도 저와 함께 행동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저 위에 전망대가 있기는 한데 올라가 봐도 사방이 모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망대는 생략하겠습니다.
차 중에서 말씀드렸던대로 이것이 계백 장군의 묘소인데 史蹟(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습니다. 대신 地自體의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지자체에서 확실한 자신은 없지만 믿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만든 겁니다.
우선 이 시를 한 번 꼭 읽어보십시오. 전경웅 씨가 처음부터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계백의 달

시인 윤순정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 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 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의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 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끊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힌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을유년 새 달에 야관 쓰고 목인 새기다.」

계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아주 짧게 기록이 돼 있어요. 김유신은 무려 3편에 걸쳐 원고지 약 200장 넘는 분량으로 기록돼 있는데 계백에 대해서는 몇 줄 밖에 없습니다. 그 시작이 이렇습니다.
「…백제 사람으로 仕路(사로)에 나가 達率(달솔)이 되었다. 당 고종이 소정방으로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이 장군이 되어 결사대 5000명을 뽑아 막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羅의 大兵을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快(쾌)함만 같지 못하다’하고 그만 다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陣營을 만들었다. 신라 군사와 만나 장차 싸우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越의 임금 勾踐(구천)은 5000명으로 吳의 70만 명의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은 모두 다 힘을 내 決勝(결승)하여 국운에 보답하자’ 하고 무찔러 싸우니 한 명이 천 명의 적을 당해내는 격이어서 신라병이 그만 물러갔다. 이렇게 진퇴하기를 네 번이나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죽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단순하게 기록돼 있지 않습니까. 이 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달솔이라는 직관은 정2품 정도의 직위라고 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쓰여진 대로 자기 처 자식을 다 죽이고, 전투에 나가서 관창을 잡았을 때 살려 보내준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보면 어떤 분인지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제가 1950년대 국민학교 다닐 때 남자애들끼리 별명을 하나씩 붙였습니다. 당시 제 별명이 계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김유신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역사소설을 보면서 김유신이 백제군에게 이기는 걸 보면 제가 당하는 것처럼 화가 나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다가 김유신을 높게 평가하게 된 것은 나이 40, 50되면서부터 였습니다.
계백의 姓(성)이 뭐냐 하는 질문이 많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계씨일 수도 있고 왕족이라면 餘(여)씨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라고 하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계백이 이름일 수도 있고 성일 수도 있습니다. 관창은 김관창이고 반굴도 김반굴입니다. 신라는 거의 다 김씨입니다. 자, 같이 둘러봅시다.
계백의 무덤이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온 것은 사실인데 17세기부터 관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을 1676년에 정비하고 1680년에 충곡서원을 세운 겁니다. 저기 뒤에 보면 서원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당시 신라와 백제의 환경을 비교하면 인구는 백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동원력은 신라가 강했습니다. 전쟁에서는 신라가 이겼습니다. 그렇게 전쟁은 동원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라는 각 행정조직이 말단까지 잘 조직돼 호출하면 금방 모일 수 있었습니다. 북한도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도 호출하면 내일이라도 약 1000만 명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호출하면 예비군들이 잘 안모이지 않습니까. 전쟁은 민간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군인들이 대표로 하는 거기 때문에 동원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은 휴대폰이 있으니까 예전과는 좀 다르겠죠.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6·25 당일날 군인들에게 외출을 허락했었죠. 6·25 전날 육군회관이 개소식을 했습니다. 육군의 장성급들이 전부 모여서 댄스파티를 하는 바람에 대부분 집에 자정이나 새벽 2시에 들어갔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6·25가 터졌을 때 자고 있었습니다. 부관이 채병덕을 늦게 깨웠습니다. 6·25 때 새벽 4시부터 전면전이 벌어졌는데도 채병덕씨는 아마 8시, 9시 돼서야 일어났을 겁니다. 그때 육본 작전국장 이런 사람들을 소집하려고 해도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으니까 소집이 안되는 겁니다. 마침 그 날이 일요일이니까 어디 놀러가고 그러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자 차에다 마이크를 달고서는 ‘○○○ 장군님 나오세요’ 이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제 내려가 보실까요. 박물관을 보신 다음에 버스로 오시면 됩니다.
출발이 조금 늦었습니다. 앞으로 약 40분 정도 가면 부여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대명식당이라고 구드레 나루, 백마강 나루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식당입니다. 거기서 식사를 하시고 그 다음에 조금 더 이동을 해서 해설해 주실 분을 만나서 오후에는 부소산성, 정림사지를 구경하도록 하겠습니다.
금방 박물관에서 구경하신 건 별 건 없었죠.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을 만든 겁니다. 요새 전국의 각 군이나 시마다 지방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 건축물을 많이 짓고 있는데 문제는 내용물이 좀 부족하다는 겁니다.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립박물관도 가보시면 건물은 좋은데 유물이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유물은 앞으로 채워나가면 되니까요.
군사박물관이라는 것은 그 내용물을 채울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안됩니다. 그런 나라로는 유럽의 기사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뉴욕에 가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라고 아주 큰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박물관의 1층에 가면 무기 전시실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서양의 무기, 갑옷, 칼, 총 이런 게 전시돼 있습니다. 동양을 대표해서 제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일본입니다. 일본의 갑옷, 그 다음에 칼 이런 것은 유럽의 칼, 갑옷과 비교해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징기스칸 군대의 유물은 다 어디갔느냐 궁금해 하실 건데 그걸 보려면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군사박물관에 가셔야 합니다. 터키에는 육군 박물관과 해군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 육군 박물관에 가면-터키 군대가 원래 기마 민족 출신이기 때문에-우리와 비슷한 무장이 많습니다. 투구 이런 것이 그렇구요, 특히 활 같은 것이 비슷합니다. 저는 일본과 터키 양쪽 군사 박물관이 아시아의 대표적 군사 박물관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말에 갑옷을 씌워놓은 것을 보셨습니까. 쇠조각을 붙여서 갑옷을 씌워놨는데 이게 유럽에 가면 말에 씌우는 갑옷이 다릅니다. 완전히 철판을 씌운 것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것을 보시면 저런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에도 보면 말에다 저런 갑옷을 씌워놓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저렇게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 때 발굴된 천마총이나 이런 무덤에서는 제법 잘생긴 칼들이 많이 나옵니다. 環頭大刀(환두대도)라고 해서 칼손잡이가 이렇게 동그랗게 된 칼이 많이 나오는데 오히려 고려, 조선 시대로 내려가면 칼이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짧아지고 모양도 이상하게 변합니다. 文弱해지니까 무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마민족은 뭘 잘하는 사람들이냐. 칼이나 창을 잘 쓰는 게 아니라 활을 잘 쏩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기마민족 특유의 전법입니다. 그래서 활은 기마 민족 출신이 제일 잘 쏩니다. 우리가 洋弓(양궁)에서 계속 우승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터키 사람들도 양궁을 잘 하죠. 그러니까 뭔가가 우리 DNA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고주몽, 이성계 등은 전부 활을 잘 쏘아서 유명해진 사람들이죠. 東夷族(동이족) 할 때도 큰 大자와 활 弓자를 붙여놓은 겁니다. 그래서 큰 활을 쓰는 사람이 동이족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활은 아주 짧고 유럽에서 사용한 거나 영국의 로빈훗이 쓴 활은 롱보우(Longbow)라고 해서 큰 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짧은 우리나라 활이 서양의 큰 활에 비해 멀리 나가고 관통력이 좋았습니다.
기마민족이나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말과 활의 힘이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 사람들은 싸움을 하면 멀리서 활을 먼저 쏘아 적진을 혼란스럽게 만든 다음 칼로써 승부를 결정했습니다.
유럽 기사들은 완전무장을 하면 마치 로보캅처럼 쇳덩어리로 무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무장하면 안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무장한 기사가 말까지 무장시키면 갑옷 무게만해도 150㎏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니까 만약 옆으로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반면 징기스칸의 군대는 정면만 가릴 정도의 가죽으로 만든 가벼운 갑옷을 입고 말도 작은 조랑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했던 말은 요새의 경주마 같은 말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보는 조랑말과 비슷한 종류였습니다. 그 말이 빠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구력이 굉장히 뛰어나고 성격이 순하며 먹이를 스스로 찾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사료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죠.
이런 말을 몰고 유럽에 나타나니까 13세기 당시 징기스칸 군대를 처음 본 서양의 기사들은 막 비웃었다는 것 아닙니까. 저 거지 군대와 우리가 어떻게 싸우냐면서 말이죠. 그런데 막상 싸워보니까 전혀 다른 겁니다. 징기스칸 쪽에서 활을 집중적으로 쏘는 데 화살이 100미터, 200미터를 날아와서 내려꽂히면서 웬만한 갑옷도 뚫어버리더라는 겁니다. 특히 말을 맞추면 말이 날뛰면서 대혼란에 빠지는 등 결국 기사들이 거의 다 졌습니다. 이런 전투를 통해 활이 기마 민족의 표상이 됐다 그런 말씀입니다.
일본의 박물관에 가면 칼이 국보로 지정된 것도 많습니다. 일본칼은 담금질도 여러 번하고 쇠를 여러 겹으로 접었다가 두드려서 펴기를 여러 번 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단련을 하면 쇠가 강해져서 칼싸움을 할 때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 일본칼을 제일 많이 만든 곳이 尙美會에서도 여행을 했던 시마네(島根), 돗토리(鳥取) 부근인데요 거기의 박물관을 보면 화관 박물관이라고 아주 유명한 박물관이 있고 일본도를 연구하는 연구소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러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군함을 수입해서 러시아 함대와 싸웠습니다만 그 이후에는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1920년대에 들어가면 세계 3대 해군국이 됩니다. 3대 해군국이란 미국, 영국, 일본입니다. 이렇게 된 비결 중 하나가 조선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조선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쇠를 만드는 기술이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겁니다. 즉, 일본도 등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조선업은 한국이 단연 세계 1등 아닙니까. 한국 조선업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데 그것도 일본을 설명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쇠 다루는 기술을 삼국 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간에 잊어버렸다가 조선업을 시작하면서 다시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造船(조선)이라는 게 건설업의 연장선장이라고 하더군요. 집 짓는 거나 배 짓는 게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옆으로 눕힌 것밖에 차이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그래서 정주영씨가 현대건설을 경영하던 그 밀어붙이기식으로 조선업을 시작하니까 딱 체질에 맞더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현대 중공업이라는 어마어마한 회사가 하나 생긴 겁니다.
현대 중공업하면 여러분들 1987년부터 1990년,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强性(강성) 노조의 중심이었지 않습니까. 현대 중공업 노조가 골리앗 크레인이나 기중기를 몰고 나오기도 하고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서 점거하기도 하는, 그런 노사분규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요새 노조 중에서 제일 얌전한 것이 현대 중공업 노조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현대 중공업에 가서 물어보니까 현대 중공업의 이직률이 연간 1~2%밖에 안된답니다. 평균 임금이 아마 6000만 원 정도 될 거에요. 그리고 거기 주소가 울산광역시 동구인데 울산 동구 문화회관을 한 번 갔더니 거기 있는 연주장이 예술의 전당 연주장하고 똑같습니다. 그것을 현대 중공업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울산 동구 사람들은 현대 중공업 덕분에 굉장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업이 행정 기관 역할까지 맡아서 하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복지 기관인지 기업인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렇게 이직률도 적고 말이죠.
기술도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현대 중공업에서 자랑하기를 ‘세계의 바다를 떠다니는 배 열 척 중 하나는 저희가 만든 겁니다’ 라고 하더라구요. 거기 공장이 약 300만 평 정도의 면적인데 마치 현대판 피라미드를 보는 거 같아요. 어마어마한 공장과 배가 전부 쇳덩어리로 이뤄진 것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집중돼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면 노틀담 사원이나 성 베드로 사원 등을 보면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탈리아 사람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른 것 보면 어떨지 몰라도 현대 중공업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게 우리의 관광 자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걸 보면 기죽을 필요가 없겠다 생각됩니다. 포항 제철소나 광양 제철소를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숨이 막힐 정도일 겁니다. 이게 우리의 살아있는 관광자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의 테헤란로도 외국 사람들이 오면 제일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테헤란로의 역동성이라든지 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침에 마이크를 잡았을 때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희망적인 것을 이야기하게 되네요. 한국이 이렇습니다. 한쪽을 보면 희망적이고 다른 쪽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아침에 신문보면 절망적이 됐다가 저녁에 누구를 만나고서는 희망적이 되는, 하루에 절망과 희망을 냉·온탕 오가듯이 몇 번을 왔다갔다하는 게 한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종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봐야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속단은 금물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냐, 우리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땀, 눈물을 흘렸는데 망하기야 하겠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걸 듣습니다.
망해서는 안되죠. 우리가 이제 선진국이 돼야 하는데 어쩌다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목표가 너무 하향조정된 것 같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나라인 거 같습니다. 간혹 미래가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제는 통일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다는 식으로 낙관만 할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세 가지가 있는 거 같습니다. 하나는 자유통일을 하게 되면 선진국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처럼 분단고착 상태가 오래가면 서로 內紛(내분)이 일어나거나 이런 대통령들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은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적화통일이 되는, 이런 세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통일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모두 애국심을 가져야 될 것이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하면 분단고착이 계속 될 것이고 사람들이 좌익들의 선동에 넘어가버리면 적화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국민들의 책임입니다.
하여튼 세 갈래의 길에서 이리 가느냐 저리 가느냐 하는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미국이 우리 대신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야 되는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1. 인구 많은 백제와 병력이 많은 신라의 전쟁

“백제 인구가 신라의 세 배라고 해서 백제가 더 강했을 것 같지만 신라는 더 많은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편집자注: 21편은 11월 13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도중 이기승 모어댄 뱅크 회장에게서 기마민족과 삼국 시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부소산성에 도착해서는 김무환 부여군수와 박경남 부여군청 문화관광 해설사로부터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 유적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다.

이기승 모어댄 뱅크 회장: 제가 기마민족과 몽고 군대에 대해 잠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몽고 군대는 1240년에 헝가리까지는 진격을 했지만 유럽 내륙까지는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군대는 몽고한테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헝가리 군대가 절대 강자였습니다. 헝가리는 기마민족 국가로써 896년 카스피해 북부에서 민족 대이동을 통해 8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헝가리 평원으로 가서 정착하면서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동한 인구가 80만 명이라면 말타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20만 명 정도됐을 겁니다. 그 당시 유럽의 전체 인구는 약 2000만 명이 될까말까였습니다.
이때 유럽 기사들은 헝가리 마자르족의 기병부대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몽고 군대와 유럽 기마병이 직접 붙은 적은 없었습니다만 마자르족과 유럽 기사들의 전쟁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헝가리에 가면 당시의 무기나 여러 가지 전쟁유물을 전시한 무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유물을 통해 보면, 마자르족이 처음 유럽으로 들어갔을 때 유럽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유럽 군대와 마자르족 군대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당시 유럽의 기사들이 입던 갑옷의 무게가 馬具를 빼고도 약 40㎏이었습니다. 나중에 총이 나오면서는 60~80㎏에 육박합니다. 그 정도 무게니까 실질적으로 싸움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자르족은 유럽 기사들의 주변을 돌면서 화살로 공격한 반면 기동성이 떨어지는 기사들은 상대방을 칼로 칠 기회도 없고 대응도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 기사단의 전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스포츠 경기였습니다. 같이 갑옷 갖춰입고 馬上 경기하는, 룰(Rule)을 정해놓고 승패를 가르는 게임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는 게 유럽이 마자르족한테 50년 동안 수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자르족은 봄과 여름에는 자기 농사를 짓다가 가을철 수확기가 되면 5000명에서 2만 명 정도씩 떼를 지어 다니며 프랑스와 독일의 유수한 지역을 약탈하거나 조공을 받으러 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 오토 대왕의 신성로마제국은 마자르족을 막기 위해서 모인 겁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서 결국 마자르족을 敗退(패퇴)시켰습니다. 이긴 게 아니라 침략을 처음으로 막아낸 겁니다. 그후 마자르족은 침략, 약탈 경제 쪽은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약탈 습관을 버리게 됐습니다. 그후 마자르족은 유럽의 수문장 역할을 합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강대했을 때 유럽에서는 마자르족의 헝가리가 독자적인 힘으로 오스만 제국을 막아냈습니다. 물론 20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내느라고 인구가 줄어들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싸우려면 무기도 그렇고 갑옷도 그렇고 철이 가장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철방법이 발달하지 않아 쇠라는 게 지금의 귀금속 정도로 희소가치가 높아서 전쟁 시에는 일반 생활도구라든지 농기구에는 쇠를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제철 기술은 일찍부터 발달했었지만 제철 과정에 필요한 연료, 목탄이 부족해서 실제 철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 시대에는 나라에 있는 철은 모조리 갑옷과 무기로 활용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유적들을 보셨지만 품앗이를 할 때면 쇠를 모두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하니 쇠붙이로 된 유물은 원형대로 보존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보면 당시 백제인구가 300만 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인구가 100만 명이라는 것을 볼 때 백제가 더 강성했던 것 같지만 신라는 5만 명을 무장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백제가 농업 능력은 있었지만 병력 동원은 안 됐던 겁니다. 인력을 동원하려면 어느정도 무기가 있어야 되는데 무기 보충도 안되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15세부터 40세 남성이 전쟁을 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론상으로는 300만 인구 중에서 50~60만 명까지 동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성기에 동원했을 때라고 해도 3만 명 정도밖에 동원을 못했습니다. 백제에는 무기 보급에 절대적인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鄭淳台(정순태) 월간조선 편집위원이라고 월간조선에 역사스페셜을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조 편집위원님과는 절친한 친구십니다. 저도 그 분과 여행을 한두 번 정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이분이 술을 좋아하셔서 여행을 같이 하다보면 맨날 새벽 2시까지 붙잡혀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옛날 전쟁 이야기,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십니다. 삼국 시대 인구에 대해서도 그 분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의 戶數(호수)가 76만 戶(호), 고구려가 69만 戶(호)였다고 합니다. 한 가구당 5,6명 정도의 식구가 있었다고 보면 백제 인구를 약 300만 명으로 봅니다만 다른 기록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인구에 대한 기록은 삼국 시대도 있고 고려 시대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가면 인구에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만 기록의 신뢰도가 문제가 됩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5000만 명 정도 됐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2세기까지가 漢나라입니다. 그 후에 隋(수), 당나라 때도 전쟁 등을 거치는 바람에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세기, 11세기까지도 인구가 50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습니다. 로마도 전성기 때 인구가 50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와 중국 인구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가 7000만 명, 중국이 13억 명 정도니까 약 20분의 1정도 되죠. 당시 중국에는 개발이 안된 곳들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함경도 등 개발되지 않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아무리 많아봐야 중국 인구의 10분의 1을 넘을 수 없었고 15분의 1정도가 유지됐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추측하면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300만 명 정도로 유지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유럽 지역은 우리보다 훨씬 후진국이었으니까 비교가 안됩니다. 10세기 영국 인구가 100만 명에서 150만 명이었고 프랑스 인구가 400만 명이 안됐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삼국 시대의 인구가 50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은 좀 무리한 해석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제 인구는 최대 300만 명 이상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150만 명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고구려 인구는 백제보다 많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마자르족이 유럽을 약탈하던 것처럼 고구려의 지배계층도 이런 약탈 경제를 영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영토는 넓지만 실제 인구는 많지 않았다고 봅니다. 신라도 100만 명 정도까지 추산할 수 있습니다만 백제 인구를 반 정도로 평가 절하한다면 신라 또한 그렇게 추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과거 인구에 대한 통계는 많은데 통계가 각각 고무줄 같습니다. 여러 연구자들이 낸 통계가 다릅니다. 세금을 거둘 때는 터무니없이 적게 보고를 하고 식량을 준다고 하면 몇 배가 늘어나고 하는 게 당시의 통계들이니까요. 인구증가는 농업 생산력과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종 시대가 농업 생산력이 많이 향상됐던 시기라고 합니다. 농기구도 발전하고 작물도 개량되고 이모작이 정착된 것이 그 시대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 중종 때 인구가 많이 늘어납니다. 늘어난 인구가 약 1000만 명입니다. 많이 보면 1200만 명까지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 인구는 500만 명 정도로 봅니다. 하여간 서기 원년부터 1300~1400년까지는 세계적으로 인구증가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疫病(역병)이 돌고 飢餓(기아)가 생기기도 하면서 인구가 늘어나질 않았습니다. 전쟁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징기스칸의 몽고군 침략 당시 중국 인구는 반절 정도 줄었습니다. 宋나라 전성기 때 중국 인구는 1억2000만 명까지 갔다가 明이 개국할 때는 9000만 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우리나라도 40년 동안 對蒙(대몽) 항쟁을 했으니까 그 때 인구가 절반 정도로 줄었다면 300~400만 명까지 줄었을 거라는 그런 추정도 가능합니다. 저도 아마추어라 정확할 수는 없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소산성에 도착>
조갑제: 여기 김무환 부여군수님을 소개합니다. 일요일인데도 尙美會를 위해 일부러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김무한 부여군수: 우리 대한민국 언론의 최일선에서 일하시는 趙자, 甲자, 濟자 대기자님, 세계적인 대기자님이시죠. 그 일행분들께서 저희 백제 역사와 문화를 보기 위해서 이 작은 도시인 부여에 와 주신 것에 대해 부여군민과 함께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에 있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부여군 것도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는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희가 너무 큰 것을 맡아 심부름을 하고 있어서 어떨 때는 죄송하기도 하고 저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단, 백제의 역사, 문화하면 의자왕의 失政, 痛恨의 눈물, 亡國 뭐 이런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게 아쉽습니다. 저희 부여군에서는 사비·백제 문화가 과연 부정적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해서 삼국 중에서 가장 우수했던 역사, 일본보다 우수했던 역사를 캐봤습니다. 그랬더니 열두 개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수한 것 스무 개를 캐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신 분들께 부탁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서동요’라는 드라마 세트장도 저희 부여군에서 유치를 했습니다.
저희 郡은 양송이 버섯 특산지로도 유명합니다. 전국 유통량의 45%를 차지합니다. 그 다음에 전국 밤 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부여군에서 나는 밤은 젊은 밤나무에서 나기 때문에 제일 품성이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께 약소한 선물로 조금 준비를 했습니다.
저희가 세계 사물놀이 대회를 유치해서 매년 열리게 됩니다. 올해는 13개국에서 왔습니다. 내년에는 25개국에서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희들은 앞으로 정성을 다해 후손들과 전문가들, 여행자들을 위해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백제 역사와 문화를 열심히 보전하겠습니다.
또 저희는 羅濟 동맹을 통해서 백제에서 삼국의 복덕방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저희도 백제를 본받아 평양, 경주와 함께 정치적인 것보다는 문화적인 교류를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현재 평양, 경주와 교류를 추진 중입니다. 앞으로도 과거 삼국 지역의 통합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박경남 부여군청 문화관광 해설사: 안녕하세요. 안내를 맡게 된 부여군청의 문화관광해설사 박경남입니다. 저는 오늘 관광객이 오시니까 나오라고 해서 나왔는데 군수님께서 직접 소개를 하셔서 놀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러분 풍납토성, 몽촌토성 아시죠. 백제가 그곳을 수도로 해서 한강 유역에서 약 500년 가까이 스무 명의 왕이 재위에 있었어요. 그런데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南進정책에 의해 공격을 당해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이 아차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수도를 옮긴 것이 지금의 공주, 公山城(공산성)에 왕궁을 세우신 겁니다. 그런데 공주에서는 문주왕, 상근왕, 동성왕, 우리가 잘 아는 무녕왕, 성왕까지 다섯 명의 왕에 걸쳐 64년밖에 거주하지를 못했어요. 급하게 왕실을 옮긴 것도 있지만 공주의 지형상 위에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하기는 쉬웠지만 백제의 기상과 뜻을 넒히기에는 공간이 좁았습니다. 게다가 요즘 표현으로 하면 백성들이 水害를 당해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공주에서 수도를 옮기신 성왕의 아버지가 무녕왕이시고 할아버지가 동성왕이세요. 동성왕 때부터 수도를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겠구나 생각을 하십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냥을 갑니다. 그때부터 부여에 扶蘇山城(부소산성)도 쌓으시고 반대편에 聖興山城(성흥산성)도 쌓으시구요. 여기저기 계속 사냥을 나가면서 수도를 옮길 계획을 하셨습니다. 아들인 무녕왕 때는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구요. 그의 손자 되시는 성왕 때 15년 정도를 공주에 계시다가 재위 16년 되는 해 과감하게 수도를 지금의 부여로 옮기세요. 그래서 부여는 538년 성왕 16년부터 의자왕 20년인 660년 7월 뜨거운 여름에 羅唐 연합군에 의해서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123년 동안 백제의 수도를 했던 곳입니다.
백제는 700년 왕조이고 서른 한 명의 왕이 계신데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했을 때를 한성 시기라고 하구요. 공주에 잠시 머물렀을 때를 웅진 시대라고 하구요. 여기 오신 것을 사비 시대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부소산성도 있구요, 정림사지 백제탑도 있구요. 그리고 의자왕의 아버지이신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 SBS '서동요' 보시나요? 그 전설이 깃들어 있는 金堂址(금당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수도로 했던 여섯 명의 왕과 왕의 가족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 고분군도 있거든요. 이곳들을 모두 다 가시겠지만 부소산성에 오셨으니까 부소산성과 주변 유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릴께요.
여러분들이 관광안내소에서 걸어 올라오실 때 왼쪽에 보면 지금 잔디가 깔려있고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일대 부소산성의 남쪽을 공주에서 수도를 옮긴 그 왕궁터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금 발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소산성은 왕궁지의 북쪽에, 부여의 鎭山(진산)이라는 부소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거든요. 이 부소산을 평상시에는 임금님이 산책도 하던 궁궐의 後苑(후원)으로 활용했고 위급시에는 수도를 보호하는 성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면 성이 보호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궁성일 수도 있고 행정구역을 보호하는 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만리장성도 있고 우리나라에는 천리장성도 있죠.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성을 長城(장성)이라고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부소산성은 왕궁이나 수도를 보호하는 궁성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이 위치한 입지에 따라서 분류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평지가 많잖아요. 그래서 평지에 성을 쌓았을 때는 平山城(평산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면적에 비해서 산이 많다보니 산성이 많이 발달했어요. 그리고 성벽 재료를 뭘로 하느냐에 따라서 土城(토성)일수도 있고 石城(석성)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중국 같은 경우는 벽돌 하나하나를 구워서 접착제로 쌓은 塼築城(전축성)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부소산성은 산에 있으니까 산성이고 보호하는 주체가 왕궁을 보호하기 때문에 궁성입니다. 그리고 흙과 돌을 함께 재료로 사용한 土石 混築城(혼축성)이거든요.
부소산성의 위치를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산성이 우리 발 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길을 죽 가다보면 둔덕같은 오솔길이 보일 거에요. 그게 백제 시대 산성의 성벽이거든요. ‘에게, 이게 무슨 성이야. 너무 낮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1400년 전에 都城(도성)을 보호했던 성벽이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다니시기 쉽게끔 잘 다져놔서 낮게 보이는 것이지 성벽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시면 경사가 져서 충분히 성으로써의 기능을 합니다. 그러니까 산이 많이 경사진 부분에는 굳이 성벽을 높이 쌓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파르지 않고 평평한 지역에는 성벽을 좀 높이 쌓아서 인력도 덜 들고 자연지세를 잘 이용해서 성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부소산성을 돌아보시면 백제 시대 임금이 동쪽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하루의 국정을 계획하셨다는 迎日樓(영일루)도 있구요, 밝은 달빛 아래 임금께서 술도 한잔 하셨다는 送月臺(송월대), 지금은 泗疵樓(사자루)라고 하는 곳도 있거든요. 사자루 밑에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落花巖(낙화암)도 있어요. 낙화암은 잘 아시죠.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조선 시대 임금님이 거느렸던 궁녀의 숫자가 약 400~500명밖에 안됐다고 해요. 그런데 과연 삼국 시대에 백제가 아무리 왕성했기로서니 3000명의 궁녀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구요.
백제가 무너질 때 부여 시내는 일주일 동안 불바다가 되고 백마강은 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그때 신라군의 총사령관 김유신은 육군으로 쳐들어오고 당나라의 총사령관 소정방은 수군으로 쳐들어와요. 이렇게 점점 수도가 위험해지니까 도성 안에 있던 아낙네들과 궁녀들이 모두 부소산성으로 들어와 있었겠죠. 그래서 성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데 결국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무너지면서 의자왕은 북문을 이용해서 웅진성으로 피신합니다.
그때 도성에 남아있던 아낙네들과 궁녀들이 쫓겨쫓겨 올라간 곳이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낙화암으로 갔다고 보는 겁니다. 삼국 시대에는 그랬어요. 그 나라가 지면 상대편 나라의 종이나 노예가 되죠. 여자들은 어떻게 될지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더럽게 살다 죽느니 깨끗하게 국운과 함께 하겠다’해서 궁녀뿐만 아니라 도성에 살던 여인들까지 함께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삼천궁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거든요. ‘3000’이라는 숫자는 3000명이라는 의미보다는 많은 여인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은 겁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墮死巖(타사암)이라고 돼 있습니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낙화암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아래를 한 번 내려다 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낙화암 바로 밑에는 잘 아시는 皐蘭寺(고란사)도 있습니다. 백제 시대 임금님이 거기에서 나는 약수를 즐겨 마셨다고 하구요, 그 약수를 마셔서 위장병도 없었고 피부병도 안걸리고 원기왕성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옆에 간단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지만 가서 보시고 약수를 드셔보세요. 약수 한 잔에 세 살씩 젊어진다고 하니까 계산 잘 해서 드시구요.
먼저 여기 있는 三忠祠(삼충사)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삼충사는 백제 말기 의자왕 때 세 명의 충신을 기린 사당입니다. 왼쪽부터 成忠(성충), 興首(흥수), 階伯(계백)의 영정입니다. 성충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냐. 의자왕이 재위 말기에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니까 국정에 조금 소홀했습니다. 이때 ‘임금님 국정에 전념하십시오’하고 충언을 했더니 감옥에 가둡니다. 성충은 감옥에서도 단식투쟁을 하면서 충언을 계속 합니다. 결국 굶어 죽으면서 마지막에 유서를 남깁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님을 잊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지금 국운으로 보면 외적이 처들어올 것 같은데 만약 수군이 쳐들어 오면 기벌포-지금의 장항이라고 합니다-를 막으시고 육군이 쳐들어오면 탄현-지금의 논산 부근-을 막으십시오’라며 유서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렇게 성충이 죽어도 계속 임금님이 그러시니까 이번에는 흥수라는 분이 충언을 드립니다. 그러자 귀양을 보냅니다. 흥수라는 분이 귀양을 가 있을 때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옵니다. 그때 임금님이 당황해서 다른 신하를 흥수라는 분에게 보냅니다. ‘흥수에게 물어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랬더니 흥수라는 분도 성충이라는 분과 마찬가지로 육군이 쳐들어오면 어디를 막으시고 수군이 쳐들어오면 어디를 막으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간신들이 이 말을 전하면서 말하죠. ‘임금님, 성충과 흥수는 임금님에게 미움을 받고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입니다. 과연 맞는 말을 했을까요’하고 임금님에게 말합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려는 운명이었는지 그렇게 망했거든요. 계백 장군은 잘 아시죠. 김유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5戰 4勝 1敗를 했던 장군입니다. 삼충사는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사당으로 들어가실 때는 내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이 사당은 1957년에 생겼습니다. 지금 보시는 건물은 1981년도에 다시 세운 겁니다.
백제에는 신하의 관등이 16관등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14관등, 신라는 중앙은 16관등, 지방은 하나의 관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까 설명드린 성충, 흥수, 계백입니다. 여기 자세히 보시면 백제 佐平(좌평) 흥수공이라고 써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 밑에 제일 높은 관직이 좌평이고 그 다음이 達率(달솔)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계백 장군은 좌평이 아니라 달솔이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는데 이 영정은 초상화는 아닙니다. 이분들에 대해 요즘처럼 사진이 있거나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분들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신과 무신의 특징을 생각해서 그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는 영일루입니다. 현판에는 ‘寅賓出日(인빈출일)’이라고 해서요 ‘삼가 동쪽으로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이 쓰여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산이 계룡산 연천봉입니다. 여기 보면 백제 시대 임금께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쳐다보면서 하루의 국정을 계획하고 정리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영일루라고 하지만 원래 백제 시대에는 迎日臺(영일대)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오르신 건물은 백제 시대 건물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부여 관내에 있는 鴻山(홍산)이라는 관아의 문루를 옮겨다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조선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소산은 높이가 106m밖에 안됩니다. 부여는 백제하면 떠오르듯 완만한 지형을 가진 곳입니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지형입니다. 자, 그러면 다음 코스로 이동하겠습니다.
부소산이라는 이름은 백제 시대 말로 부소는 소나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소산은 솔뫼가 되는 거죠.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이라고 불리다가 부소산이라는 명칭이 조선 시대에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때부터 산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사비는 소부리라는 말과 연관이 있답니다. 소부리가 수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조갑제: 일본 사람들이 관광오면 고향에 온 것 같다는 이야기 안합니까?

박경남: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부여에 오면 부소산과 정림사지는 꼭 들릅니다. 부소산은 하나의 산으로 된 게 아니라 두 개의 산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금 작은 산이 있고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높은 산으로 가고 있거든요. 거기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습니다.
半月樓(반월루)라는 곳에 한 번 가보시겠어요. 생긴 지는 얼마 안됐습니다. 1972년에 만들었습니다. 여기 가시면 부여 시내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저기 보시는 곳이 宮南池(궁남지)입니다. 신라 雁鴨池(안압지)보다 40년이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거기서 나온 쇠조각 등 유물이 있습니다. 논바닥에도 수로 흔적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낙화암은 조금 더 올라가야 합니다.

조갑제: 지금 보시는 강이 백마강입니다. 부여 시내를 한 바퀴 돌고 군산으로 빠집니다.

박경남: 의자왕도 조금만 달랐으면 어떻게 됐을까 질문을 하시는데요. 의자왕도 재위 15년 때까지는 해동공자라고 해서 중국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정치를 잘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 우리들 집안도 男과 女가 서로 화합을 잘 해서 꾸려가야겠지만 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의자왕의 첩실 중에 恩古(은고)라는 여자가 있어 의자왕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원인이 됐고 하여튼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서 백제가 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잘 아시죠. 백제는 660년에 망했지만 백성들은 3년 동안 광복 운동을 해서 城을 여러 개 되찾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 지도부의 내분으로 인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합니다. 그때 일본이 백제의 광복을 지원하기 위해서 병력 등을 많이 지원해 줬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어떤 분은 만약 백제가 삼국 통일을 했다면 일본과 지금 이런 관계도 아니고 한 나라일 텐데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역사의 결과를 가지고 假定(가정)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쪽이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음양의 조화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송월대입니다. 임금이 달빛 아래서 술도 한 잔 하고 했다는 곳입니다. 한 번 올라가 보시죠. 여기가 송월대입니다. 지금은 사자루라고 부릅니다.
여기가 낙화암입니다. 높이를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요 100m는 안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정확한 높이는 저도 한 번 알아볼께요. 낙화암에 왔던 초등학생들은 ‘왜 치마를 이렇게 뒤집고 떨어졌을까요’ 묻기도 하는데 그건 겁이 나니까 그렇게 했다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여기를 보시면 알 수 있지만 다이빙 선수, 넓이뛰기 선수라도 여기서 뛰어내리면 바로 강에 닿지 않습니다. 나중에 배를 타고 지나가시면서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소산이 자랑하는 멋진 경치로는 백마강에 얽힌 것들도 볼 수 있지만 달이 비치는 백마강이 출렁이는 모습, 부소산에 내리는 저문 비, 낙화함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 노을에 비치는 백제탑, 귀암津에 들어오는 돛단배, 저녁 어스름에 비가 내리는 장면 등 부여 팔경이 있어요. 너무나 멋진 장면들입니다.
여기가 고란사입니다. 고란사에 오셨으니까 '皐蘭寺 曉鐘(고란사 효종)'에 대한 시조를 들려드릴께요. 시조 제목이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효종)에요.

고란사 흰 구름이 천년이라 생각났다.
흐르는 저 종소리 망국한을 아는 듯이
옛 강산 울려만 주고 고요히도 사라져라.

이 시조는 부여 팔경 중에서 고란사에 얽힌 시조입니다. 다음에 부여에 오시게 되면 하룻밤 주무시고 새벽에 여기를 한 번 올라와 보세요. 너무 멋있습니다. 저는 출근하면 부소산의 멋진 모습이 너무 좋아서 혼자서 뛰어다닙니다. 이걸 누군가에게 알려 드려야 되는데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부여에 오셔서 하룻밤 주무시고 아침에 부소산에 와보세요. 정림사지 5층 석탑같은 경우에도 눈발이 날릴 때는 너무 멋지거든요. 계절을 달리해서 가보셨던 유적지에 가시면 자연도 계절에 따라 옷을 달리 입듯이 문화재도 계절에 따라 옷을 달리 입는 걸 보실 수 있답니다. 너무 멋져요.
이제 마지막으로 定林寺址(정림사지)에 가실 겁니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538년에서 600년 사이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정림사라는 절에 있는 5층 석탑과 石佛坐像(석불좌상)을 보러 가실 건데요, 거기 석탑을 이야기하실 때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라고 하셔야 됩니다. 그 탑은 백제 시대 탑입니다. 백제 시대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부여가 일주일 내내 불바다가 될 때 그 절은 다 타버리고 탑만 유일하게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1400년 전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다 보고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석탑을 보시게 될 겁니다.
나라가 망하고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 시대에 다시 절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절의 기와에서 고려 시대 절 이름이 정림사라는 게 밝혀집니다. 그래서 탑을 이야기할 때는 정림사지라는 절 터에 있는 5층 석탑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끼리는 百濟塔(백제탑)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절이 세워진 것은 백제 시대지만 우리가 부르는 정림사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에 중건된 절 이름이거든요. 도표를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텐데요, 다시 중건될 때 백제 시대의 강당 자리를 고려 시대에는 金堂(금당)으로 보고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가서 석불과 석탑에 얽힌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 앞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하면 정림사지고 우회전을 하게 되면 國南池(국남지)라고 있습니다. 매년 7월 말에 국남지 연꽃 축제를 하거든요. 사진작가들이 많이 와서 사진을 찍어 갑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을 돌아봐도 국남지만큼 예쁜 연꽃이 있는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국남지 이번에는 못보셨죠. 기회가 되시면 내년 축제 때 오셔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5월 말이나 6월이 연꽃이 가장 예쁘더라구요. 그때 오시면 제가 자신있게 설명드릴 수 있으니까 그때 한 번 꼭 와주세요.
여기가 정림사지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사는 정림사지 전시관 공사입니다. 원래는 2005년 올해 완공이 예정이었는데 내년 10월 정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礎石(초석) 위치에 따라서 복원한 겁니다. 연못도 원래 연못터가 있어서 만든 겁니다. 저기 입구에 비치된 안내문에 보시면 국보 9호 5층 석탑이 있다고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내 연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산에 있는 절에 가다보면 꼭 다리나 물을 하나 건너게 되요. 그 물을 건너면서 세속의 때를 벗고 간다는 洗心川(세심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蓮池(연지)도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다음입니다. 이 강당 건물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아까 가셨던 부소산입니다. 여기는 왕궁의 바로 남쪽입니다. 그러니까 백제 시대의 시가지에 있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국남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 백제에 많은 사찰이 있었겠지만 이 사찰은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찰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특징이 탑 하나에 금당 하나, 강당 하나, 그리고 이 문에서 강당까지 이렇게 回廊(회랑)이 있는 겁니다. 일본의 사천왕사같은 경우에도 이런 형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해서 일본 사람들도 정림사지에는 많이 옵니다. 이 연못은 부처님의 세계에 오기 전에 속세의 나쁜 마음과 때를 벗고 들어간다는 세심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기를 지나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은 절에 가면 불상이 중심이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절의 중심은 탑이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 만든 탑이 많습니다. 탑은 쉽게 말해서 부처님의 무덤이에요.
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우리나라 국보 9호고 익산 미륵사지탑과 함께 유일하게 現存(현존)하는 백제의 탑입니다. 익산의 탑이 먼저다 정림사지 탑이 먼저다 제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탑은 149개의 돌로 쌓은 것입니다.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석탑에 적용시켰다고 해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탑입니다. 지금 이렇게 보시면 잘 안보이실 텐데 1층 塔身(탑신)의 기둥을 隅柱石(우주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백제의 양식인 배흘림 기법이 남아있다고 해요. 그리고 4층 위에 깨진 부분이 있어요. 일제 시대에 누군가가 사리함을 도굴해가면서 뚜껑을 떨어뜨려 깨졌다고 하거든요. 여기 탑이 있고 저기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이 금당터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불상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 뒤에 크게 殿閣(전각)을 만들어 놓은 게 백제 시대 강당터입니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장소였죠.
이 정림사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의 절 기와에 나오면서 이 절을 정림사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저 강당은 백제 시대의 형식에서 보면 강당이고, 고려 시대에는 저곳을 금당으로 봤어요. 그래서 저기에 들어가면 큰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천천히 가시면서 보세요.
여기 보시면 글자가 보이실 거에요. ‘大唐平百濟國碑名(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1단의 네 면에 쓰여 있습니다. 한때는 이 탑이 平濟塔(평제탑)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망하고 소정방이 이 탑을 세워 자기 승전기념문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기적으로 안맞구요, 이미 세워진 탑에 ‘미개한 백제를 친 소정방이 승리를 하고 의자왕과 大小臣僚(대소신료) 88명과 12300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간다’고 씌여 있습니다. 이렇게 탑이 거뭇거뭇한 것은 당시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절이 탈 때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탑은 1400년 전에 백제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겁니다.

조갑제: 여기 쓰여있는 글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만 해도 백제가 멸망한 다음 500년 뒤에 쓰여진 책이거든요. 하지만 이 글귀는 소정방이 자기 공적에 대해 백제가 망한 지 한 달 뒤에 쓴 겁니다. 660년 8월에 쓴 거죠. 거의 실시간으로 쓴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것은 거의 해독이 됐습니다. 글 내용은 거의 자기 자랑뿐입니다. 왜 신라와 백제가 싸웠느냐, 어떻게 백제를 쳤는지, 의자왕의 부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욕하는 내용 등 백제의 멸망 원인과 함께 당시 백제의 인구 등 현황에 대해 자세히 써놨습니다. 이 글귀는 8월에 썼다고 합니다. 탑을 한 달 만에 만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있던 탑에 글귀를 새겼다고 하는 게 정설입니다.

박경남: 부여 박물관에 가시면 중앙에 야외 전시실이라고 해서 石槽(석조)가 있습니다. 그 석조는 부소산성 아래의 왕궁터 추정지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마 왕궁에서 睡蓮(수련) 같은 거 심고 봤던 石蓮池(석연지)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도 이것과 똑같은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글귀를 새기다가 그게 만만치 않으니까 이 탑에다 새긴 걸로 추측하거든요. 다음 번에 오시면 부여박물관도 한 번 가보세요.
여기가 백제 시대의 형식으로 따지면 강당터지만 고려 시대에 重建(중건)하면서 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절의 중심이 탑에서 붙상으로 점점 옮겨갑니다. 이 불상도 보물 108호입니다. 이 불상을 보시면 많이 마모되고 가슴 윗 부분이 몸통과 다르잖아요. 머리가 떨어져 나간 걸 고려 시대 후에 누군가가 얼굴이 연자방아 돌리던 돌을 올려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오래 사셨던 분들 말씀에 따르면 그냥 露天(노천)에 널려있었던 것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만들어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백제의 부드러운 선이라든지 이런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불상의 손이 많이 마모돼 오른손은 거의 안보이는데 원래의 손모양을 보면 지혜를 상징하는 毘盧舍那佛(비로자나불)이라고 합니다. 한 번 둘러보시죠.

조갑제: 자, 다같이 기념촬영 한 번 합시다.



22. 세 번째 통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자기 것을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잃을 게 많은 사람부터 싸워야 합니다.”

편집자注: 22편은 삼국통일기행의 마지막편이다. 11월 13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마지막으로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으로부터 백제 멸망과 삼국통일에서 배워야 할 교훈에 대해 듣는 장면이다.

조갑제: 백제가 멸망한 뒤에 어떻게 됐냐 하면 의자왕하고 열네 명의 왕자들은 당나라로 붙잡혀 갔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을 용서합니다. 의자왕은 풀려난 후에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중국 西安(서안) 지역에서 죽었습니다.
의자왕의 아들 중에는 일본에 볼모로 간 왕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이 扶餘豊(부여풍)입니다. 이 사람은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5000여 명의 일본군대를 데리고 와서 부흥운동에 합세했습니다. 그러다 663년, 어제 설명 드린 벽촌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합니다. 패배한 후에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뒤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의자왕의 태자였던 扶餘隆(부여융)은 어떻게 됐느냐. 이 사람은 그 뒤에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돼버렸습니다. 백제가 망한 다음 백제 지역이 신라에 바로 편입된 것이 아닙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 지역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만듭니다. 그 도독으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임명합니다. 이런 방식은 당나라가 식민지를 분할·관리하는 통치 수법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신라에서는 상당히 찝찝하게 생각을 했죠. 백제 땅은 자신들이 가져야 하는데 당나라 관할이 되고 당나라 군대가 주둔을 하게 된 겁니다. 백제 부흥운동 또한 664년에 끝났습니다. 당나라는 백제 땅에서 부흥운동이 완전히 평정됐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에 땅을 내주기는커녕 신라 문무왕과 백제의 부여융을 불러서 앞으로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게 만듭니다. 이건 문무왕에게는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이고 더구나 문무왕의 누님을 죽게 했다 해서 사비성이 함락될 때 문무왕이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너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 골치가 아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불가침 조약을 맺도록 한 겁니다. 하지만 당나라가 워낙 강하게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664년 약속을 하게 됩니다.
667년 신라가 당에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백제 땅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신라는 對唐(대당) 결전을 시작하면서 먼저 백제 땅을 점령합니다. 그때 백제 땅이 처음으로 신라 땅이 된 겁니다. 우리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면 660년 백제가 완전히 망하면서 그 땅이 신라 것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가 백제 지역을 점령하자 부여융은 견디지 못하고 당나라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당나라는 신라에 의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도 부여융을 신라를 견제하는 데 써먹으려고 만주 지역에 帶方郡(대방군)이라는 것을 만들어 왕으로 앉힙니다. 부여융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망한 백제 왕족의 후손들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姓氏는 이천 徐씨, 부여 徐씨가 됩니다. 부여 徐씨가 이천 徐씨에서 나왔죠. 당나라에서 의자왕에게 徐씨로 姓을 바꾸라고 해서 부여 徐씨가 생겼다는 그런 기록도 있는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부여 徐씨 집안에서 백제왕대사라는 제사를 지내죠. 그게 의자왕을 제사 지내는 겁니다.
정림사지를 마지막으로 해서 삼국통일 역사기행이 끝났습니다. 그거 보셨죠. ‘大唐平百濟碑銘(대당평백제비명)’이라고 써놓은 거 말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사람이 백제탑 벽에다 자기의 공적을 새기고 돌아가 버렸는데 그걸 우리는 ‘平濟塔(평제탑)’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우다가 이제야 정림사지 5층 석탑으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아주 굴욕적인 거죠.
이런 것은 전쟁에 진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를 참 잘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 날짜를 보니까 말이죠,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전멸한 게 660년 7월 10일, 사비성이 함락된 것이 그 열흘 뒤입니다. 그리고 관광 해설사가 ‘사비성은 일주일 동안 불바다가 되고 백마강은 피바다가 됐다’고 설명한 그 상황의 흔적이 탑신에 시커먼 자국으로 남아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아주 아름다운 석탑입니다. 또 백제탑은 唯二(유이)한 거죠.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단 두 개입니다. 신라의 탑은 통일된 이후에 만든 것들도 많습니다만 백제의 탑은 딱 두 개라고 하니까 저도 ‘아, 그렇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탑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고 그 몸에다 역사를 새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보통 탑이 아니라 그야말로 역사의 榮辱(영욕)과 哀歡(애환)을 몸으로 겪은, 역사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찾자면 지금은 없지만 중앙청이 그렇죠. 중앙청을 없앤 게 김영삼 대통령의 무식함의 소치입니다. 현대사의 영욕을 다 지켜본 건물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경복궁 복원된 것과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물론 시원한게 보기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중앙청도 있고 경복궁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서 일단 삼국통일 기행을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부록으로 삼국통일을 이해하는 데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제가 나눠드린 책 중에서 ‘匈奴王國(흉노왕국) 신라’라는 부분을 보시면 좋을 겁니다. 天馬塚(천마총)을 보셨으면 제가 설명 드리기 더 좋을 텐데 이번에는 천마총을 못보셨으니까요. 천마총에 들어가 보면 금관이나 그 유물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6세기 들어와서입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디의 영향을 받았느냐. 북방 유목민족들, 스키타이族, 그 다음에 로마와 교류한 흔적 등이 나타납니다. 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이 대표적입니다. 거기서 발견된 유리잔은 생긴 것 자체가 그리스 로마에서 디자인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극동의 제일 구석에 있던 신라가 4세기, 5세기에 북방의 상인들을 통해서 지금의 시리아, 불가리아에 있던 서로마와 무역을 했다는 겁니다.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鷄林路(계림로) 고분에서 출토한 유물들 중에 유리잔도 있고 서로마에서 수입한 보검, 칼 등이 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신라의 지배민족은 중국의 영향을 받기 전에 서방과 먼저 교류해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망하고 중국에서도 왕조가 바뀌면서 교역 루트에도 변화가 와서 교류가 끊어진 거 같아요. 그 뒤에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중국 문화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즉, 원래 신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가치관-샤머니즘, 토착적인 신앙 등-때문에 불교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가 고유한 정신적인 문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중국의 농경문화와는 다른, 북방의 기마민족 등 다분히 서방적인 것과 연결이 돼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異次頓(이차돈)도 순교를 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라가 통일을 할 때도 중국 대하기를 상전처럼 대한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 나름의 것이 있다. 너희가 아무리 큰 나라라도 밑에 가서 종노릇은 못 하겠다’ 하면서 對唐결전을 결심한 것과 연결이 된다 이겁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신라의 지배민족, 즉 金씨가 흉노와 관계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제가 나눠드린 것을 읽어보시면 거기 모두 정리가 돼 있습니다. 오늘 구경한 것도 정순태 편집위원이 國寶(국보)기행을 통해서 자세하게 적어놨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오늘 설명들은 것을 참고하시면 더 확실하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새벽에 도로를 보면 ‘야, 한국이 정말 力動(역동)적인 나라구나’하는 것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신나기도 합니다. 도로라는 게 인체에 비교하면 혈관이거든요. 도로에 이렇게 많은 차가 왔다갔다 하면서 생산도 하고 놀러가고 하는, 이게 사람들 사는 모습입니다. 북한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면서 차를 네 대 봤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식량을 줘도 이것을 지방에 나눠줄 수단이 없습니다. 수송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움직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석유소비량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석유 소비량이 세계 몇 위인지 아십니까. 작년까지는 세계 8위였고 올해는 아마 7위 정도 될 겁니다. 그 양은 약 8억 배럴 정도 됩니다. 북한의 연간 석유 소비량은 남한의 3일치 석유소비량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죽은 사회라는 거죠.
우리나라는 이렇게 석유를 많이 소비합니다. 올해 유가가 배럴당 40달러였다면 약 320억 달러를 석유수입에 쓴 겁니다. 올해 우리나라 수출이 약 2600억 달러, 수입이 약 2500억 달러입니다. 그중 320억 달러가 석유수입에 들어갔습니다. 옛날보다는 경제규모에 비해서 그 비중이 많이 줄어서 그런지 기름 값이 올라도 기름 적게 쓰자는 말을 별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1970년대에는 수출해서 번 돈의 3분의 1을 석유수입에 썼거든요.
이 도로가 닦여진다는 게 인간의 문명을 바꾼다는 걸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 때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 기억나십니까.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어떻게 시작했느냐. 각 마을에 시멘트와 철근을 갖다 주는 게 새마을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걸로 뭘 만들었느냐.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農路(농로)를 확장한다’이랬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당까지 트럭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길을 낼 때 보면 꼬불꼬불한 길을 곧게 내면서 자기 담장도 날아가고 하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랬으면 정부에서 다 보상을 해줬을 텐데 그때는 각자가 길이 될 땅을 마을에 기부하는 식으로 해서 길을 넓혔습니다.
그 다음에는 초가지붕을 현대식으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옛날 농촌에 사셨던 분들 기억나시겠지만 1년에 한 번씩 초가지붕 가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나중에는 지붕을 가는 기술자들도 점점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슬레이트로 갈면서 초가지붕을 없앴습니다.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이 성공한 것은 여성 새마을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새마을 지도자의 약 40%가 여성이었습니다. ‘왜 여성들이 새마을 지도자가 됐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농촌이 근대화되지 않아서 고생을 제일 많이 한 당사자가 여성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 지도자들이 일어나서 새마을 운동을 벌였다는 겁니다.
오늘날 여성 에너지의 대폭발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출발점은 여성 새마을 지도자들입니다. 1960년대에는 여성들이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1970년대에는 신발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제가 한때 기사를 잘못 써서 신문사에서 쫓겨난 다음에 국제상사 신발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국제상사 2000여 명 직원 중에서 70%가 女工(여공)이었고 그 여공 중에서 70%가 열일곱 살 이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1974년부터 우리나라가 중동에 진출을 했습니다. 1970년대 하면 사람들이 유신시대라고 기억합니다. 최근 정치하는 사람들은 1970년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같은 사람은 암울한 시대라고 합니다. 아니, 1970년대가 암울했습니까. 물론 저도 그때 실직자가 되기도 하고 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도 받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만 보면 고생했다고 하겠지만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경험을 한 건 아닙니다.
70년대 우리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진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로 석유를 사오면 딱 맞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오일쇼크(Oil Shock)를 제일 잘 극복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전부 산업투자를 축소할 때 우리나라는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습니다. 1970년대 외국에서는 다 투자를 줄이는반면 우리는 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한 덕분에 최신 설비도 싸게 샀습니다. 그때 만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이 오늘날 경제의 밑바탕이 돼 있지 않습니까. 1970년대는, 새마을 운동, 중화학 공업 건설, 중동진출, 이 세 가지만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남북 대결에서 우리가 군사비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게 1976년부터입니다. 남북체제대결에서 우리가 이기게 되는 결정적 시기인데 이 시기에 자기가 당한 게 있다고 암울한 시기라고 부르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자기 집에 전기 안 들어온다고 세상이 암흑천지입니까. 그런 식으로 역사를 보는 세력들이 학자라든지 야당이라면 큰 문제가 아닌데 오늘날 집권세력이 돼 있으니까 문제죠. 하여튼 1970년대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업, 기업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뛸 정도로 발전하고 있고 선진화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구석에서는 赤化(적화)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선진화라는 이야기와 적화라는 이야기가 같은 나라에서 나오는 걸 보면 세계에서 제일 희한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아니, 6·25가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TV 토론을 한다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텔레비전 방송에서 맥아더 때문에 통일이 안 되서 원통하다는 사람과 정상적인 사람이 토론하는 걸 가만히 보면 ‘저런 토론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6·25가 北侵(북침)이라는 사람과 南侵(남침)이라는 사람이 토론을 해야 남침인지 북침인지 알 수 있는 겁니까. 이건 진돗개를 보고 개라는 사람과 고양이라는 사람이 토론을 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을 공중파 방송에서 중계를 해주고 있는 꼴입니다.
아까 서정자 여사님께서 점심시간에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쪽에서 조명탄을 터뜨리면서 내려오는 걸 직접 보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침을 목격한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북침했다고 주장하는 이 미치광이들이 지금 집권 세력 안에 들어가 있어요.
이걸 정확하게 말하면 말이죠, 이런 표현을 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지금 노무현 정권은 제2의 南勞黨(남로당) 정권입니다. 왜 남로당 정권이냐. 핵심세력의 상당수의 부모들이나 처가 어른들이 남로당 활동을 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한민국에 대대로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가야 할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분열정권이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중용한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반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려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않고 ‘모택동을 존경한다’ 뭐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이미 남로당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南勞黨(남로당)과 北勞黨(북로당)이 연방제를 하는 게 맞죠. 무슨 말씀을 드리는 지 아시겠습니까.
앞으로는 연방제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요즘 2007년 대통령 선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요즘 여론 조사를 해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20%대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하로는 잘 안내려 갈 겁니다. 한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면 확실한 親김정일 세력이 10%, 인구로 하면 약 500만 명입니다. 거기에 다른 10%가 적극적으로 附和雷同(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수가 20%니까 1000만 명입니다. 이들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보도 있고 돈도 있고 공권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4800만 명 중에서 親北反逆(친북반역)세력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 1000만 명이라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적과의 동침 중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지는 반면 親北反美(친북반미) 여론은 지금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디어 절반을 넘었습니다. 54%라고 합니다. 미국이 한국의 동의 없이 북한을 공격할 때 한국은 북한과 손을 잡고 미국과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60%를 넘었습니다. 이런 결과가 왜 나오느냐. 지난 7년 동안 정권과 공중파 방송이 국민들을 상대로 親北反美여론을 확산시킨 결과입니다. 여론이 이러니까 정치인들도 다들 親北反美하면 표가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예전에는 親北反美를 주장하면 감옥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표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정치인은 표를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이제는 親北反美쪽으로 정책을 만들어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지금 노무현 정권은 뭘 기대하고 있느냐 하면 남북 정상회담을 구걸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정일에게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 ‘강정구 교수도 구속하지 마라, 북한에 250만㎾ 송전해주겠다, 앞으로 빚을 얻어서라도 대북협력기금을 늘여 연간 몇 조원씩 퍼다 주겠다’ 하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건 김정일 보라고 하는 행동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김정일에게 성의를 보이면 내년 쯤에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면 거기서 뭘 합의할 것이냐. ‘이제부터는 6·15선언을 실천하기로 한다’ 이렇게 나올 겁니다. 6·15선언에는 대남적화통일을 유리하게 하는 조건이 다 들어 있습니다. 6·15선언이라는 게 김대중씨가 김정일에게 5억 달러를 갖다 바치면서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회담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합의문은 전부 김정일의 對南赤化(대남적화) 통일을 도와주는 것들입니다. 그 내용을 해석하면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되고 우리 헌법을 개정해서 영토 조항을 바꿔야 한다는 이런 것들입니다.
자,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이 만나서 ‘6·15선언 실천합시다’하고 이야기하면 근사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6·15선언 실천은 어떻게 하느냐. 먼저 ‘연방제와 연합제를 통일하기 위해 각자의 체제를 정비하자’ 이렇게 나올 겁니다. 북한은 노동당 규약과 헌법을 바꾸겠다고 할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춰 남한도 헌법을 바꿔야 합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바뀐 헌법에 따라야 합니다만 북한의 노동당 규약과 헌법이 바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 모두 김정일의 말 한 마디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의 쓰레기와 남한의 다이아몬드를 맞바꾸는 게 되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거죠.
그러나 북한이 그런 제안을 하면 공중파 방송들부터 바로 선전에 나설 겁니다. ‘북한이 엄청나게 변했다. 헌법과 노동당 규약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도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방송에서 난리를 피울 겁니다. 여기에 맞춰 민노당, 한총련, 전교조 등 잘 조직된 각종 좌파 세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공중파 방송의 응원을 등에 업고 활동하면 과연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짓으로 봐서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改憲(개헌)이 된다는 겁니다.
그 개헌은 國體(국체)변경입니다. 즉, 연방제로 가는 개헌을 하면 어떻게 되느냐. 연방제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우리가 연방제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이렇게 알면 됩니다. 연방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됩니다. 쉽게 설명하면 북한이 말하는 연방제는 이렇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體制(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도 자기네 體制(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하자는 겁니다. 그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체제가 다른데 어떻게 통일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지금 한반도는 민족이 달라서 분단된 것이 아닙니다. 체제가 달라서 분단된 겁니다. 그런데 체제가 다른 상황을 놔두고 통일을 한다는 게 모순 아니겠습니까. 북한은 양쪽 체제는 그대로 두고 ‘통일한 척하자’는 말입니다. ‘통일한 척하자’는 말의 의미는 뭐냐. 결론적으로 남한에서 주한미군 철수하고,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공산당의 활동을 합법화, 자유화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김정일이 남한에서 절반정도의 표를 얻을 자신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북한에도 김정일 표가 2000만 명이 있으니까 이 둘을 합하게 되면 실제 김정일을 지지하는 숫자가 반대하는 숫자보다 월등히 많아진다는 겁니다. 남북한 인구 7000만 명 중에서 김정일 지지세력 2 對 반대세력 1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북한에서 인구비례로 총선거하자는 제안을 할 것이라고 김일성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구비례로 총선거해서 통일 대통령을 뽑아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2:1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미 동맹은 깨지고 주한미군은 철수하게 될 겁니다. 지금 상황은 동맹이 깨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미 동맹이 깨지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사태가 일어날 경우에 한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냐. 한국의 보수 세력과 한나라당이 이것을 막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한반도의 챔피언은 김정일이 된다는 겁니다.
김정일이 핵카드를 가지고 미국과 初志一貫(초지일관) 대결하면서 드디어 한미 동맹을 해체시켰다 그러면 누가 봐도 한반도에서의 정치적인 주도권은 김정일이 잡았다고 볼 것입니다. 왜냐. 김정일은 북한을 철권통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의 절반 정도를 자기편으로 만든 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이 되면 남한의 보수 세력은 완전히 자신을 잃을 겁니다. 자신이 있으면 그전에 한미동맹이 해체되는 상황을 막았겠죠. 한미동맹을 해체하는 것을 보수 세력이 두 눈 뜨고 남의 일처럼 가만히 구경했다고 하면 그건 벌써 한국의 보수층에는 희망이 없다는 거죠.
그 뒤에 한국의 보수층은 어떻게 되느냐. ‘앞으로 김정일 세상이 올 텐데 어떻게 나도 저 밑에 붙어 살 것인가’ 눈치를 보기 시작하던지 돈이 있는 사람은 이민을 가던지 하겠죠. 그런 분위기가 군대에까지 퍼지면 군대도 변질될지 모릅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남북한의 군사적 균형이 깨지면서 남한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국군이 북한군과 대결하면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1953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북한의 전력이 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력을 합친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주한미군의 전력을 빼버리면 그 균형이 확 기울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김정일은 전쟁을 해도 이길 자신이 있고 전쟁을 안 해도 남한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김정일이 군사력과 남한에 있는 친북좌익 세력이라는 두 가지 카드를 가지고 보수 세력을 코너에 모는 것은 아주 쉬울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그럼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람을 속이는 게 있어요. ‘主權(주권)은 국민들에게 있다’고 하니까 진짜 우리나라 정치를 국민들이 한다고 착각합니다. 정치를 국민들이 합니까. 정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하는 게 현실이죠. 국민들이 정치를 할 때는 투표할 때 한 번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투표할 때 어느 정권을 선택하느냐 그 선택만 합니다. 뽑아놓으면 그 사람들이 사기를 치던 부정을 하던 임기 동안에는 어떻게 말릴 방법이 실질적으로는 없습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하는 행동이 전부 헌법 위반인데도 말릴 방법이 없잖습니까. 이걸 말리려고 탄핵을 했을 때도 방송이 들고 일어나서 탄핵을 비판하니까 국민들이 전부 속았지 않습니까.
최근 통계를 보면서 느낀 건데 우리나라 국민들을 속이려면 간단해요. 방송과 정권이 짜고 일주일만 엉터리 정보를 준 다음에 여론조사를 하면 정권의 의견에 지지하는 사람이 50%가 넘습니다. 이번 정부에서 대북송전 250만㎾를 공짜로 대북송전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돈이 얼마나 듭니까. 10년이면 25조 원이 듭니다. 25조 원이면 연간 교육예산보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해야 한다는 사람이 60%가 넘는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 호주머니에서 세금이 나가서 김정일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런 걸 찬성하는 사람이 국민의 60%가 되면 이런 국민들이 과연 적화통일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느냐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이상은 제가 가장 어둡게 본 겁니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요새 親北左翼(친북좌익)들이 하도 엉터리 같은 행동을 하니까 국민들이 ‘아, 이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런 생각이 큰 흐름(勢)이 되려면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유일하게 그런 큰 조직을 가진 게 한나라당인데 이 한나라당도 박근혜씨가 대표가 되고 나서는 김정일 비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250만㎾ 대북송전 문제 등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한나라당이 조직적으로 반대를 한 적이 없습니다. 우파 단체라든지 신문이라든지 이런 곳에서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목소리가 작습니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이 목소리를 내야 되는데도 안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나라당은 지금 반 이상은 좌익 쪽으로 넘어가 버렸어요. 대북정책에 대한 견제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뭐, 강정구 교수 사건 때 박근혜 대표가 청와대를 향해서 ‘正體性(정체성)을 밝혀라’ 한 마디를 하더니 그 후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잖아요. 정체성을 밝히라고 했을 때 청와대에서 답변이 안 나오면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서로 무시해버리고 그냥 말 한 마디로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나라당의 정치는 대변인과 대표, 둘이서만 정치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참 난감한 문제입니다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하면 국민들이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요새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만 싸우는 단체가 생기려면 우리 국민들이 ‘아, 이러면 망하겠구나’ 하는 느낌을 빨리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벼랑에 한 번 서봐야 합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뒤로 가면 추락이다, 이젠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하는 이런 인식을 언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개구리를 삶을 때 서서히 물을 데우면 나중에 삶혀 죽습니다. 서서히 뜨거워지니까 죽을 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다 죽는다는 겁니다. 赤化(적화)도 그렇게 진행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적화 진행이 대략 30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이게 60도나 70도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죽습니다. 30도가 될 때까지 국민들 대다수가 ‘아, 이건 내 문제도 아니고 난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겠다’ 이러다보니까 악랄하게 잘 조직된 小數가 대한민국을 30도 정도 기울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70도 정도 기울게 되면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하여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게 어디까지 기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싸우기는 싸워야 되는데 어떻게 싸워야 하느냐를 가지고 저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2007년 선거가 있느냐 없느냐, 선거가 있다 하더라도 우파 단일화가 되느냐, 애국세력, 자유진영에서 단일후보가 나오느냐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2007년 선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충청도 사람들입니다. 2007년도 대선은 충청도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 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게 이상합니다. 요새 이념문제, 젊은 층 문제가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도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면 표의 70, 80%가 지역성향으로 결정됩니다. 우리가 2002년 촛불시위를 보고는 젊은 사람들은 전부 노무현을 찍었을 거야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결정적인 원인은 호남 사람들과 충청도 사람들이 손을 잡은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두 번의 좌파 정권은 호남 정권과 충청도 표의 연합으로 가능했던 겁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게 DJP연합, 1997년에는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합입니다. 연합이 아니라 야합이죠. 그리고 2002년 선거에서는 충청도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 행정수도라고 거짓말해서 수도 옮긴다는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뭐가 있었느냐. 우파 세력의 분열입니다. 1997년에는 이인제가 한나라당을 뛰쳐나오고 2002년에는 정몽준이 있었습니다. 정몽준이라는 사람은 우파 아닙니까. 기업인 출신이니까요. 그런데 좌파와 손을 잡고 후보 단일화를 합니다. 이회창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끌어안아야 할 정몽준과 손을 잡을 생각도 안했습니다. 이런 행동들로 충청도 표를 놓쳤습니다.
충청도는 지금 어떻게 돼 있느냐. 자민련과 심대평 충남지사가 만든 국민중심당이라는 당이 있습니다. 곧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이 하나 나올 겁니다. 국민중심당의 강령을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안보를 중시하는 강령을 집어 넣어놨습니다. 그것만 보면 조금 안심이 되는데 또 모르죠. 선거 때가 되면 어느 쪽으로 갈지.
그래서 충청도 분들의 애국적인 결단, 이게 다음 2007년 선거가 이뤄진다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문제는 한나라당이 자민련이나 충청도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없고 대안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한이 통일 의지가 누가 더 강한가를 가지고 대결하는 상황입니다. 북한은 줄기차게 적화통일의지를 가지고 남한을 밀어붙이고 있는 반면 남한에서는 자유통일을 하자는 사람도 없고 흡수통일을 하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일의지에서는 남한이 지고 있습니다.
삼국통일에서 신라가 이긴 건 지도부가 大耶成(대야성)의 패전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실력을 갈고 생존의 몸부림을 치다보니까 삼국통일이라는 果外(과외)의 소득을 얻게 됐던 겁니다. 이처럼 북한도 살아남기 위해서 핵무기도 개발하고 국제사회에게 앵벌이도 하고 정상회담을 가지고 5억 달러 받는 장사도 하는, 이렇게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어느새 남한에 자기편이 생긴 겁니다. 남로당 정권이 들어선 겁니다. 과외 소득이라는 겁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7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북한도 망할 지경까지 몰렸던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게 진짜 신라 같은 북한, 백제 같은 남한의 形局(형국)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항상 양쪽으로 보자는 것은 대한민국은 절망과 희망, 적화와 선진화가 공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두달 사이에 우리 국민들의 覺醒(각성)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강정구 교수 사건과 맥아더 동상 사건, 이 두 사건 때문에 보통 얌전한 사람들도 ‘이건 이래서는 안 되겠다. 뭔가 해야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이것을 조직화해서 행동으로 만들 수 있는 정당이 한나라당인데 지금 저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는 한나라당 비판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은 체제를 지키겠다고 선언한 정당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삼국통일 이야기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때와 비슷한 시기에 지금 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의 우파세력이 잘못하는 게 있어요. ‘통일하면 뭐 잘 살게 되느냐, 지금대로 사는 게 낫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좌파들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죠.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기회가 왔을 때 통일을 해야된다. 이게 민족애다’ 말이지, 이런 것 없이 ‘통일비용 많이 드니까 통일하지 말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판판이 좌익들의 공세에 당하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다소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을 각오하더라도 통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의 부담이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좌파와 대결할 때 통일의지를 뺏겨버리면 다 뺏기는 겁니다. 민족이라는 말을 좌익들이 쓰니까 우파에 있는 사람들이 민족주의는 고리타분하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좌익들에게 당하게 됩니다. 민족주의는 고리타분한 게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좋은 겁니다. 북한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가짜고 우리가 말하는 게 진짜 민족주의죠. 해방 후에 자유진영은 민족진영이라고 그랬고 북한 편을 든 사람들은 좌익 진영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이라는 말도 우리가 도로 찾아와야 됩니다. 우리가 좌익으로부터 찾아와야 할 게 많아요.
이제는 자기 나라의 운명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정주 시인이 쓴 신라에 대한 시, 또 그분이 생각하는 신라 사람들은 '이 국토의 주인은 우리다'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하고 달라서 ‘이 국토의 주인은 우리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한반도, 대한민국의 주인은 우리’라고 생각하면 그 책임에 따른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됩니다. 그냥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백성입니다. 백성과 국민의 차이가 있습니다. 국민은 싸우는 사람이고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고 주권자인데 백성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서울 강남에 사는, 체제가 무너지면 잃을 게 가장 많다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는지, 시청 앞에서 집회할 때 나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일을 안 한다고 하면 김정일에 자기 것을 갖다 바치는 것이죠.
잃을 게 제일 많은 사람들부터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누가 대신 지켜줍니까. 과거에는 대신 싸워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 검찰, 군대가 대신 싸워줬지만 그 사람들이 이제 지켜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지켜야 되는데도 그렇게 안 하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안 지키는 데 누가 지켜줍니까. 그러니까 잃을 게 많은 사람부터 싸워야 합니다. 원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는 싸워서 쟁취한 겁니다. 이렇게 공짜로 얻는 게 아닙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이야기했던 대로 민주주의라는 것은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로 자라는 나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삼국통일 기행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蛇足(사족)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세 번째 통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상미회 회원들만이라도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교훈을 배워서 남북통일로 가는 과정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게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십시오. 특히 아들딸들에게 이야기 해주십시오.
우리 주변부터 챙겨야 합니다. 자기 아들은 한총련으로 만들어 놓고 세상을 개탄하면 뭐합니까. 언론도 부장이라는 사람들이 자기 부하 직원들은 전부 친북좌파적인 기자들로 채워 놓고는 그 위에 얹혀가지고 후배 기자들이 이상한 기사 써오면 고치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부장들 때문에 지금 한국의 언론이 이렇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부하가 있는 사람은 부하를 챙기고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을 챙기고 선배는 후배를 챙기고 이렇게 자기 주변부터 챙겨야지 남을 미워하고 탓할 건 없는 겁니다. 이야기가 길어서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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